제가 이 블로그를 자주 드나들지도 않을뿐더러
로그인은 거의 한 달에 한 번 합니다.
그러니
1) 비밀덧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한달 후에 발견하는 일도 있습니다.
2) 질문은 가급적 제 이메일로 직접 주세요. egressio앳hotmail.com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partner=hanrss&ISBN=8949706814
대충 보니 권당 천쪽이 넘게 세 권으로 구성한게 1954년 플레이야드 판형을 따랐단 얘기인데요.
기회가 되면 빠른 시일 안에 번역본을 구해서 (제 돈 주고 살 생각은 죽어도 없습니다. 도서관에 들어오겠죠.) 약간이나마 원문대조를 해봐야겠습니다만.
만의 하나 프루스트에 도전하고 싶고, 아니 구입하고 싶은 분들께는 절대 비추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 양반이 예전에 번역한 셀린의 '밤끝까지의 여행'의 경우 첫 세쪽에 완벽한 오역이 열댓개가 나오더군요.
(여담인데 셀린의 저 소설은 20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프루스트 바로 다음에 무조건 들어가야할 절대고전입니다. 역시 꽤 불만스럽자만 민희식 번역보다는 훨씬 나은 이형식 번역본도 존재하고요.... 하긴 이형식씨도 프루스트 전공 서울대 교수였군요.)
그러니 프루스트 구입희망자께 권해드리고 싶은 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조금 기다릴 수 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고대 불문과에 재직했던 김화영 교수가 번역중이라니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무작정 기다린다.
(김화영씨가 현재 문예지에 번역연재중이랍니다. 은퇴하고 마지막 작업으로 삼나 봅니다. 불어 번역 전체는 몰라도 불문과 전현직 교수 중에서는 최고의 문학 번역가이고 프루스트에 대한 애정을 수십년전부터 표출해온 분이니 그냥 닥치고 진리일 걸로 봅니다. 까뮈 전집, 장 그르니에, 파트릭 모디아노 등 문학번역을 참 많이도 하신 분이죠. 참고로 저는 이분과 아직 일면식도 없습니다.)
2) 당장 사고 싶으면 김창석 번역본 (국일미디어라는 곳에서 열두권인가 열세권으로 나온 것)
3) 독어 가능자는 독역본으로 읽는다. (그나마 주어캄프의 최신 버전으로)
4) 일어 가능자는 일역본으로 읽는다. (한 판본이 압도적으로 좋다는데 뭔지 모르겠습니다.)
4-1) 이태리어 가능자는 이태리어로 읽는다.(역시 한 판본이 압도적으로 좋다는데 뭔지 모르겠습니다.)
5) 읽지 않는다.
6) 읽지 않는다.
7) 영역본으로 읽는다. (물론 예전 판본이 아니라 영국에서 90년대 중반에 나온 판본입니다.)
8) 읽지 말라고 했죠!
9) 민희식 번역본으로 읽는다.
이렇게 되겠습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김창석 판본에 대한 얘기는 김창석의 국역본(정음사/국일미디어) 번역 촌평을 참조하시고요.
| 폴커 슐렌도로프의 '스완의 사랑'은 한국에 비디오 출시된지 오래되었는데요. 아랑드롱이 샤를뤼스, 제레미 아이언스가 스완, 파니 아르당이 게르망트 공작부인이었죠. 그냥 평범한 시대극처럼 연출을 했습니다. 샹탈 에커만이 2000년에 만든 '갇힌 여인(la captive)'은 묘한 분위기의 영화였죠. 국내에 개봉을 했었고 국내에 dvd도 출시가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5권 '갇힌 여인'의 얼개를 그대로 가져와서 시대배경을 애매하게 만든 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하지만 프루스트에 충실하게 연애-질투-감금의 테마를 보이고 있습니다. 평가가 굉장히 좋았지요. 미니멀한 접근이 돋보이는 작품이었고요. 개인적으로는 라울 루이즈의 '되찾은 시간'을 더 좋아해요. (http://en.wikipedia.org/wiki/Time_Regained_(film)) 카트린 드뇌브가 늙은 오데트, 엠마뉘엘 베아르가 질베르트, 뱅상 페레가 모렐, 존 말코비치가 샤를뤼스, 알베르틴 역의 배우는 드뇌브와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의 딸이지요. 그리고 공쿠르 역으로 무려 알랭 로브그리예가 출연합니다!!! 나레이터 목소리는 여왕마고의 감독이자 무대연출자로 유명한 파트리스 셰로. 그 외에도 프랑스에서 유명한 스타들이 잔뜩 출연합니다. 그런데 초호화 캐스팅은 둘째 치고라도 꿈처럼 복잡하고 무질서한 프루스트 작품의 형식을 그렇게 영화적으로, 실험적인 방식으로 구현했다는게 놀랍더라구요. 절대 단순무식하게 플롯 따라가는 영화는 아닙니다. 물론 프루스트를 안 읽은 관객은 이해를 못하고 읽은 관객에게는 새로울게 없는, 소설을 각색할 때 늘 생기는 문제야 어쩔 수 없지만요. 이 작품은 국내에 출시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그다드 까페를 만든 퍼시 아들롱의 데뷔작이 프루스트의 하녀 셀레스트의 회고록('나의 프루스트씨')을 영화화한 작품이었다고 하고요. '베니스의 죽음'을 만든 비스콘티도 프루스트 작품을 영화하하려다 실패했다고 하더군요. 대신 비스콘티가 쓴 시나리오는 프랑스 서점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안 봤어요 ㅠ.ㅠ) |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다. 가끔은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바로 감겨서 “잠드는구나”하고 중얼거릴 시간마저 없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반시간이 지난 후, 자야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나를 깨우곤 했다. 나는 아직 책을 손에 들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 책을 내려놓고 입김을 불어 불을 끄고 싶었다. 나는 잠을 자면서도 끊임없이 조금 전에 읽고 있던 책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생각은 약간 이상한 모양이 되곤 했다. 그래서 성당, 4중주, 프랑스와 1세와 샤를르 5세의 대결 등 책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나 자신인 것 같았다. 이러한 믿음은 잠에서 깬 후에도 몇 초 동안 남아 있곤 했다. 내 이성은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놀라지 않았고 이 믿음은 비늘처럼 눈 위를 눌러서 내 눈은 양초가 지금 꺼져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윤회를 거친 후에 전생의 생각들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이 믿음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기 시작했다. 이제 책의 주제는 나와 분리되어 나는 내 마음대로 그 주제에 몰두하거나 몰두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곧이어 나는 시력을 회복하여 내 주변이 깜깜한 것에 놀라는데, 그 어둠obscurité은 내 눈에 부드럽고 아늑하지만 내 정신에는 진정 모호한obscur 사물인양 까닭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서 더욱 부드럽고 아늑한 것 같았다. 나는 지금이 몇 시일까 자문해보았다. 꽤 멀리서 열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 숲 속의 새의 노래처럼 거리를 알리면서 나에게 여행자가 다음 역을 향해 황급히 가고 있는 텅빈 들판의 넓이를 그려 보였다. 새로운 장소, 익숙치않은 행위, 밤의 적막함 속에서 아직도 생생한 남의 집 전등 밑에서 조금전에 나누던 잡담이나 작별의 인사말, 머지 않은 귀가의 즐거움 등 때문에 여행자가 가고 있는 이 작은 길은 그의 추억 속에 깊이 새겨질 것이다.
이 연대기의 바탕이 된 논문들은(60년대에 하나 있었고 80년대초에 또 하나 나왔죠) 제가 어쩌다보니 못 구했던 건데요. (문제는 88년에 판본쇄신이 이뤄진 바람에 이 연대기도 수정이 되어야 하는데 그 후론 이런 작업을 하는 연구자가 없다는 거죠)
빠진 것도 많고 (생루의 동시에르 시절 등) 약간의 문제는 보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테니 자료상 올려두렵니다. (그대로 번역하고 제가 약간 첨언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연도는 작품에서 언급된 역사적 사건들에 기반하여 재구성된 겁니다.
프루스트는 작품 속에서 연도를 명시적으로 밝히는 일이 거의 없거든요.
방대한 작품인데다 프루스트가 완성을 못하고 죽어 당연히 연대기에는 내적 모순이 많습니다.
코타르만 해도 6권에서 죽었다가 7권에 또 나오거든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내적 연대기(연도별 사건)
서술자는 편의상 마르셀이라고 칭합니다.
1879
마르셀의 부모 결혼
스완은 오데트를 알게 된다.
그 해 말에 스완은 오데트와 ‘카틀레야’를 한다.
1880
스완과 오데트의 관계가 식는다.
6월 : 스완은 생퇴베르트부인의 파티에서 뱅퇴유의 소악절을 다시 듣는다.
7월 : 마르셀 출생
10월-11월 : 알베르틴과 ‘꽃피는 아가씨들’ 출생, 모렐, 뱅퇴유 양, 질베르트 출생
그해말에서 다음해 초 : 오데트는 2년간의 지중해 유람선 여행을 떠난다
1881
그 해초 스완은 합승마차에서 코타르 부인을 만나 오데트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스완의 질투심은 가라앉는다. 스완은 콩브레로 가서 캉브르메르-르그랑댕 부인을 만난다.
1885
레오니 고모가 매년 겨울을 파리에서 보내는지라 마르셀은 어머니와 함께 설날 인사를 드리러 간다. 마르셀은 프랑수아즈(하녀)에게 5프랑을 줘야 한다.
1888
마르셀은 아돌프 종조부 집에 놀러갔는데 오데트가 와있었다. (분홍색옷의 여인 – 국역본에는 장미색으로 되어 있을듯). 이 일로 아돌프는 집안에서 배척받고 콩브레에 더 못 오게 된다
1889
스완은 오데트와 결혼한다. (오데트에 대한 사랑은 식었지만 오데트가 질베르트를 무기로 협박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결혼함)
1890
스완이 방문하는 날이면 마르셀은 엄마에게 키스를 받지 못하고 자러 가야 한다. 스완은 아직은 사교계에서 빵빵하게 잘 나감. (영국황태자나 프랑스 대통령이랑 둘이 밥먹는 정도는 일도 아님)
1892
콩브레에서 보내는 휴가들. 마르셀은 탕송빌쪽(스완네집쪽) 산책길에서 질베르트를 본다.마르셀은 페르스피에 의사의 딸의 결혼식에 갔다가 게르망트 부인을 본다. 파리에서는 스완 부인을 본다.
1894
뱅퇴이유의 딸의 동성애는 마을에서 추문을 일으킨다. 마르셀(14살)은 자위를 한다. 마르셀은 레오니 고모의 소파에서 사촌여자애와 첫 섹스를 한다. 가을에 레오니는 죽고 마르셀은 유산을 물려받는다. 마르셀은 오귀스탱 티에리의 책을 읽는다. 프랑수아즈는 이제 마르셀네 집안에서 일한다.
1895
연초에 마르셀(15세)은 피렌체와 베네치아에 가보고 싶어하지만 병으로 단념한다.
샹젤리제에서 질베르트를 알게 된다.
라베르마를 보러 극장에 간다.
노르프와 씨가 식사하러 집에 온다.
1896
1월 1일 : 마르셀은 질베르트에게 새로운 우정을 쌓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행복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관계는 곧 식는다.
10월 : 마르셀은 아직도 질베르트네 식구들과 외출을 한다.
이 시기에 블로크가 마르셀(16세)을 매춘부에게 데려간다
1897
1월 1일 : 마르셀은 질베르트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을 확인한다.
6-7월 : 레오니 고모의모친의 장례 때문에 콩브레에 간다. 산책을 나갔다가 몽주뱅에서 뱅퇴유 양과 그녀의 여자애인이 저지르는짓(아버지 사진에 침뱉기)을 몰래 본다.
8월 : 할머니와 발벡에 갔다가 ‘꽃피는 소녀들’과 알게 된다.
11월 : 드레퓌스 사건 시작.
마르셀네 집은 이사를 간다. 게르망트 공작부인과 같은 건물에 살게된다.
마르셀은 오페라 극장에 갔다가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본다. 그는 처음엔 스완 부인을 다음엔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사랑한다.
1898
부활절 경 : 마르셀은 생루와 함께 생루의 정부를 만나러 간다.
빌르파리지 부인네 파티에 초대받는다. 이 파티에서 샤를뤼스는 마르셀에게 이상한 제안을 한다.
6월 : 할머니의 사망. 마르셀은 11월에야 사교계 생활을 재개한다.
겨울 : 마르셀은 게르망트 공작부인네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이후 오리안느와 친해진다.
1899
게르망트 대공부인의 파티에 초대받는다. 샤를뤼스와 쥐피앙이 아날섹스하는것을 목격한다.
스완은 병으로 죽어간다.
1900
의사의 명령으로 마르셀(20세)은 발벡에 다시 간다. 샤를뤼스는 동시에르에서 군복무중인 모렐(20세)과 알게 된다. 라스펠리에르에서 모렐은 드뷔시의 ‘축제’를연주한다. 마르셀과 알베르틴은 베르뒤랭네 드나든다(20년전에스완과 오데트도 이 집을 드나들었다).
마르셀은 9월15일까지 발벡에 머무른다. 이 날 이후로 알베르틴은 파리의 마르셀집에 기거한다.
** 프루스트의 죽음으로 제5권‘갇힌여인’부터 마지막 권까지는 연대기가 엉망이다. (물론그 전에도 이 연대기에는 모순되는 점이 꽤 있었다.)
1901년
마르셀은 (엄마도 같이 사는 집에서) 알베르틴과 동거한다.
그해초(겨울) :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방문한다. 샤를뤼스는 62세이다.
알베르틴은 마르셀을 완전히 떠난다. 마르셀은 어린 여자애 하나를 집에 데려왔다가 미성년자 납치죄로 고발당한다.
봄 : 알베르틴은 사고로 죽는다.
만성절(11월초) 경이 되면 마르셀은 이제 알베르틴 때문에 더 힘들어하지 않고 그녀를 잊기 시작한다.
1902
연초 : 앙드레와의 대화 (및 '반쯤 육체적인' 관계)
봄 : 엄마랑 베니스에 놀러간다. 빌르파리지부인과 노르프와를 만난다. 둘 다 80세는 되었다. 마르셀은 17세의 유리장사 소녀에게 반한다. (발벡에서 만났을 때 알베르틴이 17세였다). 질베르트는 생루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려온다. (전보교환원의 오타로 마르셀은 알베르틴이 살아돌아온줄 안다)
여름 : 세번째 발벡 체류. 질베르트임신
1903
마르셀은 탕송빌에 체류하다 공쿠르 형제의 일기를 읽고 문학에 실망을 느껴 요양원에 들어간다.
질베르트는 딸을 출산(생루 양).
1904-1914
마르셀은 요양원에 들어간다. 파리에는 이후 가끔 나온다.
1914
1차대전 발발
전쟁 때문에 질베르트는 콩브레로 간다
마르셀은 잠시 파리에 나온다
1916
연초 : 마르셀은 파리로 온다. 생루를 만나고 샤를뤼스의 SM 행각을 목격한다.
생루는 전사한다. 콩브레에서 장례식이 치뤄진다.
베르뒤랭이 죽고 베르뒤랭 부인은 돈이 떨어진 게르망트 대공과 재혼한다
1917
마르셀은 샤를뤼스를 만난다.
1918
11월 : 마르셀은 불로뉴숲을 거닐며 향수에 빠진다
1919
연초 : 마르셀은 병으로 아프다. 마들렌과자를 먹고 콩브레를 떠올린다.
5-6월 : 요양원에서 나온 마르셀(39세)은 게르망트 대공부인의 마티네에 간다. 그는 계시를받고 ‘책’을 쓰기로 한다.
** 1922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 사망 **
1927
샤를뤼스 사망. 우리의 나레이터 마르셀은 이때도 열라 책을 쓰고 있음.
앞글에서 <생트뵈브 비판>의 얘기를 했지요? 그럼 이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체제가 변해온 과정을 설명해 볼께요.
여기서 작품들의 제목을 통해서 프루스트의 구성방식을 잠깐 지적해야겠군요. 뭐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요
총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입니다. 1권-6권이 ‘잃어버린 시간’을 구성한다면 7권은 <되찾은 시간>이지요. 총제와 마지막 권의 제목은 이렇게 댓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편 주지하듯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와 3권 <게르망트 쪽>은 대칭 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 산책길, 두 살롱으로 대비되는 부르주아 세계와 귀족 세계의 대비... 뭐 이런거죠.
한편 4권 <소돔과 고모라>(1부,2부)가 실질적으로는 소돔(남성동성애)만 다루고 있다면 <갇힌 여인>(소돔과 고모라 3부), <사라진 알베르틴>(소돔과 고모라 4부)은 고모라(여성동성애)를 다루고 있지요. 결국 4권과 5-6권이 또다시 대칭을 이룹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6권의 원제는 <달아난 여인>으로 5권 <갇힌 여인>과 대칭을 이루도록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6권의 출간 직전 인도 시인 타고르의 시집 '달아난 여인'이 출간되면서 6권의 제목은 <달아난 여인>에서 <사라진 알베르틴>으로 바뀝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프루스트 연구자들은 보통 5권과 6권을 묶어서 <알베르틴의 소설roman d'Albertine>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자체 완결성이 있으니까요. <꽃피는 소녀들> 중의 한 명으로 등장한 알베르틴이 주인공이 된다는 점에서 결국 2권과 5-6권은 다시 연결되지요.
한편 소제목들을 보면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의 3부는 <고장의 이름 : 이름>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그런데 2권 <꽃피는 소녀들 그늘에>의 2부는 <고장의 이름 : 고장>으로 이와 연결되지요. 이것은 1권에서 방문해 보고 싶은 고장들(발베크, 베니스, 플로렌스, 파르므 등)의 이름을 몽상하던 주인공이 2권에서 실제로 발베크를 방문하는 것이죠. 그런데 혹시 기억하실 지 모르겠지만 주인공은 고장의 이름만을 몽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름(게르망트)도 몽상하지요. 주로 1권의 1부와 3부에 나오는 얘기지만요. 그래서 본래 구도에서는 3권 <게르망트쪽>에 <사람의 이름 : 게르망트 공작부인>이라는 챕터가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3권부터는 소제목들을 넣지 않게 되면서 이러한 구도는 파괴되지요.
결국 프루스트의 글쓰기 과정을 살펴보면 여기에는 거의 강박적으로 소설의 거시적 구성을 구조화, 조직화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의도는 끊임없이 더 많이 쓰려는 글쓰기의 운동 자체로 인해 계속해서 훼방받고 파괴되지요. 하나의 대칭구도를 설정했다가 분량이 더 늘어나고 구도에 변화가 생기면서 그 구도는 깨지고 또다른 대칭구도를 설정하고.. 하는 식의 쳇바퀴운동(악순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이 거듭된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루스트가 끝까지 고집한 것이 있으니 바로 1권과 마지막 권을 두 축으로 작품을 구성한다는 원칙입니다. 주지하듯 프루스트는 <스완>과 <되찾은 시간>을 먼저 써놓고 중간을 썼지요. 그런데 양쪽 끝이 확정된 대신 그 중간부분은 끊임없이 늘어나서 저자의 죽음 이외에는 정지할 방법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이러한 구성에의 열정은 나중에 보답을 받게 되지요. 60년대에 프루스트가 재평가를 받기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이 작품이 ‘아무렇게나 쓴 회상록이 아니라 복잡하고 철저한 구성을 가진 픽션 작품’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꽤 복잡하니 간단하게 작품의 체제가 변해간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 1912년 - 프루스트는 단 한 권을 희망. 제목은 '생트뵈브 비판'이었다가 그 제목은 포기하고 '마음의 간헐'이나 '칼에 찔린 비둘기' 사이에서 고민.
2) 1913년 초. <스완네 집 쪽으로(이하 '스완')> 출판 직전
- 출판사의 요구로 두 권으로 나누기로 함. 총제 <마음의 간헐>, 상권 <잃어버린 시간> / 하권 <되찾은 시간>
3) 1913년 <스완> 출판
- 세 권으로 된 체제 예고. 총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확정
1권 스완네 집 쪽으로 / 2권 게르망뜨 쪽 / 3권 되찾은 시간
4) 1918년 제2권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
- 다섯 권으로 된 체제 예고.
1권 스완네 집 쪽으로 / 2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3권 게르망뜨 쪽 / 4권 소돔과 고모라 1부 / 5권 소돔과 고모라 2부 : 되찾은 시간
5) 실제 출판된 것
- 일곱 권 체제 (현재 판본)
6) 죽기 직전 프루스트의 계획
- '사라진 알베르틴'과 '되찾은 시간'의 중간메 몇 권을 더 써서 9권에서 10권으로 쓰려함. 생각만 있었고 대략적 구도는 있었지만 쓰지 못하고 죽음. (이에 대해서는 얘기가 너무 길어서 다음 글에서 따로 다루겠습니다. 이 글은 제 서재에 올립니다)
<<<현재 모습>>>>
(권제목과 소제목에서 상호연관성을 확인해 보세요)
1권 <스완네 집 쪽으로>
1부 : 콩브레 / 2부 : 스완의 사랑 / 3부 : 고장의 이름-이름
2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1부 : 스완 부인의 주위 / 2부 : 고장의 이름-고장
3권 <게르망뜨 쪽>
註 : 초판 출간 당시 ‘게르망뜨 쪽’은 두 권으로 나뉘어 출판되었는데 ‘게르망뜨 쪽 2부’와 4권 ‘소돔과 고모라’의 1부(40쪽 정도의 샤를뤼스와 쥐피앙의 만남)는 한 권에 묶여 있었음. 즉 게르망뜨쪽 상권(게르망뜨쪽 1부) + 게르망뜨쪽 하권(게르망뜨쪽 2부+소돔과 고모라 1부). 요즘 프랑스판본이나 한국판본은 이렇게 하지 않고 소돔과 고모라 1부를 그냥 소돔과 고모라에 넣습니다. 프루스트가 왜 이렇게 이상한 권분할을 원했는지는 책을 보신 분은 아실겁니다.
4권 <소돔과 고모라>
1부(샤를뤼스와 쥐피앙의 만남. 40쪽 정도) / 2부 (2부는 네 개의 챕터로 되어 있음. 400쪽 이상).
5권 <갇힌 여인>
또는 소돔과 고모라 3부. 또는 소돔과 고모라 3부 1장.
6권 <사라진 알베르틴느>(달아난 여인)
또는 소돔과 고모라 4부. 또는 소돔과 고모라 3부 2장.
7권 <되찾은 시간>
또는 소돔과 고모라 5부, 또는 소돔과 고모라 4부.
가. 텍스트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김창석 번역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밖에 없다. 제1권 '스완네 집 쪽으로'는 여러 번역판본이 존재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체의 번역은 김창석씨의 번역밖에 없다. (김창석씨의 번역은 예전의 정음사본이나 현재 판본인 국일미디어본이나 큰 차이가 없다).
프루스트 원고 상태를 보여주는 사진 하나.

(재번역을 시도하는 분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 얘기를 들은지가 여러 해전인데 아직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물 건너간 듯 싶다). 단, 제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의 경우 다양한 번역이 존재하므로 선택의 여지는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민희식의 번역본은 읽지 말기를 권한다).
더구나 프루스트 문장의 맛은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번역해도 전혀 느낄 수 없을만큼 불어에 특유한 것이고("프루스트가 불어를 만난게 행운이 아니라 프루스트를 만난게 불어로서 엄청난 행운”이다) 그래서 이 프루스트 문체의 결이라는 것은 한국어 통사구조상 도저히 번역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이 부분을 포기하고 나면 김창석의 번역은 대체로 괜찮은데 우선 프랑스인들이 읽기에도 숨이 차는 프루스트의 긴 문장을 우리말로 그냥 옮기는 것도 쉽지는 않은데 (원문의 문장의 길이를 대체로 유지하면서) 이토록 유려한 우리말을 만들어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젊은 외국문학 전공자들이 젖어있는 번역투와 비교하면 더욱더 놀랍다.
김창석 번역의 결정적 약점이라면 이것이 일제시대 때 수학한 사람의 손에 의해 나온 책이라는 것이다. 김창석은 이 번역을 60년대에 시작했고 이후로도 재판을 낼 때마다 계속해서 손을 보았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문체의 의고체는 어쩔 수가 없다. 지금은 쓰지 않는 표현들('정말로'라는 의미에서 '짜장'을 쓰는 것 등)이 너무 많아서 21세기의 현대 독자에게 이 작품은 1920년대 프랑스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제시대 한국 소설 같은 인상이 더 강하게 드는 것이다.
하지만 번역판인 이상 문체 부분은 접어두고 읽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정 욕심이 나면 불어를 공부해서 읽으면 되지만 사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더구나 프루스트 읽기가. 그러니 만족하도록 하자.
혹시 우리말 번역본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영역본을 읽으려고 덤비는 용감한 독자가 있다면 말리고 싶다. Remembrance of Things Past라고 제목부터 바꿔 달은 이 영역본은 프루스트 자신도 화를 냈을 뿐 아니라 끊임없는 비난을 받아 왔다. 90년대에 다시 나온 영역판(제목을 제대로 옮긴 In Search of Lost Time라는)은 이것보다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반대로 일역본은 상당히 좋다는 평판이다. 적어도 프루스트 연구에 있어서 일본은 미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을 보면 '삼촌'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적수와 누가 미국 최고의 프루스트 전문가인가를 두고 다투는 내용이 있는데 뭐 심각하게 볼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정말 웃기지도 않더라. (더구나 두 명다 게이로 설정이 되어 있다. 기가 막혀서...). 프루스트 서한집을 출간하는 Kolb를 제외하고 미국쪽에서 나온 글 중 쓸만한걸 본 기억이 없다. 반면에 일본 애들은 존중받는 연구가 적지 않다.
다. 프루스트의 다른 작품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외에 프루스트의 책으로는 <즐거움과 나날들>, <장 상퇴이유>, <생트뵈브에 반대해서>, <에세이와 논문들>, <모작과 잡록> 등이 있다. 물론 몇 권의 러스킨 번역도 잊을 수 없다.
<즐거움과 나날들>은 프루스트가 20대 초반에 자비출판으로 내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거의 대부분을 스스로 사들여 친구들에게 돌렸다는 책이다. 몇 편의 몽상적 수필과 단편소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학적 가치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후<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가지 강박적 주제들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사랑스러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30대에 들어 부모가 연이어 사망할 때까지 프루스트는 <공식적으로> 어떠한 창작도 하지 않았다. 물론 여러 해를 바쳐 매달린 러스킨 번역이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는 사교계 인사의 생활에 충실할 뿐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과 프루스트 자신에 대한 동일시가 나온 것이다. 평생을 사교계와 연애에 빠져 놀다가 어느날 갑자기 계시를 받아서 어마어마하게 긴 걸작을 집필했다는 신화 말이다!
하지만 프루스트 본인의 경우 이 신화는 완전 허구이다. 최근 들어서는 프루스트가 이 시기에도 엄청난 양의 습작에 몰두했다는 것이 공인된 견해이다. 20대의 10년 동안 프루스트가 집필한 원고는 (딱히 책으로 묶을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분량만 보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버금갈 정도이다.
그 증거물이 바로 <장 상퇴이유>인데, 이 미완성 소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주요 일화의 상당수를 담고 있다.
어쨌든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잃고난 후 프루스트는 잠시 요양원에 칩거했다가(작품에서 주인공이 요양원에서 10년 이상을 보낸 것과 달리 프루스트는 불과 수 개월만 머물렀다) 곧 자신의 <책>의 집필에 착수한다. 최초에 이것은 <생트뵈브에 반대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19세기의 문학평론가 생트뵈브를 비판하는 기획을 지닌 비평서로서 네르발, 발자크, 보들레르 등에 대한 평론을 주축으로 여러 소설적 일화들이 섞여 있다. 여기서 소설적 부분이 점점 확대되면서 바야흐로 <생트뵈브에 반대하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변모하게 된다.
결국 <생트뵈브에 반대하여>는 독립된 작품으로 출간되어서는 안되는 원고뭉치일 뿐이다. 원고 연구에 따르면 <생트뵈브...>에서 <잃어버린...>으로 옮겨가는 이행은 서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경계를 분명히 가를 수 없다. 1910년, 그러니까 1권 <스완네 집 쪽으로>를 거의 완성한 시기에도 프루스트는 여전히 이 책을 <생트뵈브에 반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부르고 있었으므로 이것이 <잃어버린...>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장 상퇴이유> 역시 <잃어버린...>의 모체인 습작으로 간주할 수 있으므로, “프루스트는 단 한 권의 책만을 썼다”는 말은 괜한 미사여구가 아니다.
이외에 논문 모음집(<에세이와 논문들>), 패스티쉬 모음집(<모작과 잡록>) 등이 있는데, 특히 프루스트의 “모작”들은 그의 문학적 역정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프루스트는 발자크, 플로베르 등 여러 작가의 문체를 모방하여 여러 편의 글을 써보았는데 (예컨대 ‘르므완느 사건’이라는 하나의 일화를 여러 작가의 문체로 다시 쓰기) 이것은 선배 작가들의 문체를 분석하는 기회인 동시에 자신의 문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되찾은 시간>을 보면 주인공이 공쿠르 형제의 회상록 중 출판되지 않은 원고를 읽는 장면이 나오는데 작품 속에 그대로 인용된 이 원고는 프루스트가 공쿠르 형제의 문체를 모방해 쓴 패스티쉬이다.
이 중 <즐거움과 나날들>은 안암문화사에서 91년에 번역이 나왔으며, 동일한 책이 <사랑의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정암출판사(1989)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후자의 경우 한국 불문학 사상 가장 악명 높은 번역자인 민희식의 이름이 붙어있지만 전자보다 구하기도 쉽고 전자에 빠져있는 몇 가지 글들을 온전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추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책의 비쥬얼한 측면, 인쇄-조판, 번역 등은 전자가 백 배 낫다).
<장 상퇴이유>와 <생트뵈브에 반대해서>는 아직 번역이 없다. 일본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만도 세 종류의 번역본이 있고 프루스트 전집 자체가 나와 있으며 심지어 프루스트의 서한집마저 상당히 번역되어 나왔다지만(대체 이런 짓을 왜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인들의 프루스트에 대한 열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우리 나라에서 프루스트의 지명도는 이미 세계적인 프루스트 연구자(특히 조 요시다)를 여럿 배출한 일본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니 거기까지 바랄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프루스트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이 책들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한국에 언제 번역판이 나올지 안타깝기도 할 것이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 책들은 (책이라고 불러야할지도 의문이지만) 번역하기도 어렵고 번역되지 않는 것이 낫다.
우선 <장 상퇴이유>와 <생트뵈브에 반대해서>는 둘 다 근본적으로 미완성 원고라는 어려움이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잃시찾'도 미완성이지만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이 두 책은 완전히 초고 상태이고 전체 구성도 제대로 없고 문장도 이가 안 맞는 부분이 수두룩하다. 더구나 <생트뵈브에 반대해서>의 경우에는 기존의 두 판본 모두 문제가 많아 새로운 판본이 나와야한다는 얘기가 많은데 문제는 새로운 판본이 나온다 해도 논란은 사라지지 않을거란 것이다.
결국 누군가가 이 책들을 한국어로 번역 출판하려고 하면 당장 어려움이 많다.
(1) 둘 다 미완성 원고이다.
(2) <장 상퇴이유>의 경우는 젊을 때의 작품이라 잃시찾에 비해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
(3) <생트뵈브에 반대하여>는 소설 형식이 아니라 약간의 소설적 파트와 노골적인 비평문이 뒤섞인 형식이어서 독자가 편하게 읽을만한 책이 못 된다.
(4) <생트뵈브에 반대하여>는 판본 정립 자체가 문제가 많다. 더구나 '생트뵈브'를 집필하다 점차적으로 책의 구도를 바꿔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된만큼 수많은 원고 중에서 어디까지가 순전히 생트뵈브이고 어디부터가 잃시찾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최근 학계의 의견은 생트뵈브가 독립적 텍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이 책 중 하나를 번역해서 출판했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가뜩이나 중요성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프루스트이고 더구나 '잃시찾' 일곱 권을 번역판으로라도 완독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천명이나 될지 의심스러운 판에 작가의 다른 작품 두 개가 출판된다고 하자. 그러면 오히려 세일즈 면에서는 나을지도 모른다. 왜? 분량만 엄청 길고 읽기 빡빡한 잃시찾 대신 좀 더 만만해 보이는 이 두 권에 덤벼드는 독자가 많을테니까.
그런데 막상 책은 내용이 후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책들을 읽고 프루스트에 흥미가 생겨 '잃시찾'을 제대로 읽는 독자가 늘어나기는 커녕..... 역효과만 날 것이다.
결국, 아쉽지만 저 책들은 그냥 번역이 안 된 상태로 남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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