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독 공지 공지사항

이미 한 번 쓴 내용인데요.

제가 이 블로그를 자주 드나들지도 않을뿐더러
로그인은 거의 한 달에 한 번 합니다.


그러니

1) 비밀덧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한달 후에 발견하는 일도 있습니다.
2) 질문은 가급적 제 이메일로 직접 주세요. egressio앳hotmail.com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블로그를 찾는 분들께 (필독) 공지사항

1. 원래 이곳에 있는 글들은 daum의 프루스트 까페(cafe.daum.net/Proust)에 제가 올린 글들을 가져온 것입니다. 
처음엔 분위기가 좋았는데 까페가 완전 망해버려서 제가 올린 글이라도 보관하려고 옮겼죠.
옮기면서 조금씩 고쳤고요.


Too many characters. Maximum: 200.

이어지는 내용

천식과 번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훌륭한 프루스트 영화를 만든 라울 루이즈의 인터뷰를 뒤늦게 읽고 있는데 웃긴 얘기가 나오는군요.
프루스트는 전염성이 강해서 스페인어판 번역자가 번역 도중 천식에 걸려 죽었다는 겁니다.
라울 루이즈의 주장으로는  폴란드어 역자, 이태리어 역자, 일본어 역자도 천식으로 죽었다고 하고요. (정말인가?)

문득 재작년에 모 출판사에서 받은 프루스트 번역 제의을 거절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권 번역은 아니고 한 권을 번역해달라는 제안이 왔었거든요. 당연히 못 한다고 했고요. 김화영이 번역을 하고 있다는데 어찌 제가 명함을 내밀겠습니까.)
다름 아니라 제가 작년에 (그동안 호흡기는 멀쩡했는데) 천식이 걸렸거든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을 모면한 거라는...^^





사진은 프루스트가 (본 집필용 공책이 아니라 구상이나 메모를 적는) 작품의 작업노트로 썼던 공책들carnet. (무척 길쭉합니다.)



오프모임 후기 오프모임



어제 1월 22일 토요일에 오프모임을 열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

민희식씨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새 완역본을 내놨군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partner=hanrss&ISBN=8949706814


대충 보니 권당 천쪽이 넘게 세 권으로 구성한게 1954년 플레이야드 판형을 따랐단 얘기인데요.


기회가 되면 빠른 시일 안에 번역본을 구해서 (제 돈 주고 살 생각은 죽어도 없습니다. 도서관에 들어오겠죠.) 약간이나마 원문대조를 해봐야겠습니다만.


만의 하나 프루스트에 도전하고 싶고, 아니 구입하고 싶은 분들께는 절대 비추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 양반이 예전에 번역한 셀린의 '밤끝까지의 여행'의 경우 첫 세쪽에 완벽한 오역이 열댓개가 나오더군요.

(여담인데 셀린의 저 소설은 20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프루스트 바로 다음에 무조건 들어가야할 절대고전입니다. 역시 꽤 불만스럽자만 민희식 번역보다는 훨씬 나은 이형식 번역본도 존재하고요.... 하긴 이형식씨도 프루스트 전공 서울대 교수였군요.)



그러니 프루스트 구입희망자께 권해드리고 싶은 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조금 기다릴 수 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고대 불문과에 재직했던 김화영 교수가 번역중이라니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무작정 기다린다.

   (김화영씨가 현재 문예지에 번역연재중이랍니다. 은퇴하고 마지막 작업으로 삼나 봅니다. 불어 번역 전체는 몰라도 불문과 전현직 교수 중에서는 최고의 문학 번역가이고 프루스트에 대한 애정을 수십년전부터 표출해온 분이니 그냥 닥치고 진리일 걸로 봅니다. 까뮈 전집, 장 그르니에, 파트릭 모디아노 등 문학번역을 참 많이도 하신 분이죠. 참고로 저는 이분과 아직 일면식도 없습니다.)


2) 당장 사고 싶으면 김창석 번역본 (국일미디어라는 곳에서 열두권인가 열세권으로 나온 것)


3) 독어 가능자는 독역본으로 읽는다. (그나마 주어캄프의 최신 버전으로)


4) 일어 가능자는 일역본으로 읽는다. (한 판본이 압도적으로 좋다는데 뭔지 모르겠습니다.)


4-1) 이태리어 가능자는 이태리어로 읽는다.(역시 한 판본이 압도적으로 좋다는데 뭔지 모르겠습니다.)


5) 읽지 않는다.


6) 읽지 않는다.


7) 영역본으로 읽는다. (물론 예전 판본이 아니라 영국에서 90년대 중반에 나온 판본입니다.)


8) 읽지 말라고 했죠!


9) 민희식 번역본으로 읽는다.


이렇게 되겠습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김창석 판본에 대한 얘기는 김창석의 국역본(정음사/국일미디어) 번역 촌평을 참조하시고요.








인터넷의 잃시찾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불어, 영어로 원본 텍스트가 인터넷에 있습니다.
 오디오북도 일부 있네요.

 여기 가면 pdf 파일로 전부 있고요.

영화화된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에 올린 줄 착각했는데 안 올렸었군요.)

영화에 대해 간단히 얘기하면 

폴커 슐렌도로프의 '스완의 사랑'은 한국에 비디오 출시된지 오래되었는데요. 아랑드롱이 샤를뤼스, 제레미 아이언스가 스완, 파니 아르당이 게르망트 공작부인이었죠. 그냥 평범한 시대극처럼 연출을 했습니다.

샹탈 에커만이 2000년에 만든 '갇힌 여인(la captive)'은 묘한 분위기의 영화였죠. 국내에 개봉을 했었고 국내에 dvd도 출시가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5권 '갇힌 여인'의 얼개를 그대로 가져와서 시대배경을 애매하게 만든 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하지만 프루스트에 충실하게 연애-질투-감금의 테마를 보이고 있습니다. 평가가 굉장히 좋았지요. 미니멀한 접근이 돋보이는 작품이었고요.

개인적으로는 라울 루이즈의 '되찾은 시간'을 더 좋아해요.
(http://en.wikipedia.org/wiki/Time_Regained_(film))
카트린 드뇌브가 늙은 오데트, 엠마뉘엘 베아르가 질베르트, 뱅상 페레가 모렐, 존 말코비치가 샤를뤼스,
알베르틴 역의 배우는 드뇌브와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의 딸이지요.
그리고 공쿠르 역으로 무려 알랭 로브그리예가 출연합니다!!!
나레이터 목소리는 여왕마고의 감독이자 무대연출자로 유명한 파트리스 셰로.
그 외에도 프랑스에서 유명한 스타들이 잔뜩 출연합니다. 

그런데 초호화 캐스팅은 둘째 치고라도 꿈처럼 복잡하고 무질서한 프루스트 작품의 형식을 그렇게 영화적으로, 실험적인 방식으로 구현했다는게 놀랍더라구요. 절대 단순무식하게 플롯 따라가는 영화는 아닙니다. 물론 프루스트를 안 읽은 관객은 이해를 못하고 읽은 관객에게는 새로울게 없는, 소설을 각색할 때 늘 생기는 문제야 어쩔 수 없지만요. 
이 작품은 국내에 출시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그다드 까페를 만든 퍼시 아들롱의 데뷔작이 프루스트의 하녀 셀레스트의 회고록('나의 프루스트씨')을 영화화한 작품이었다고 하고요. 

'베니스의 죽음'을 만든 비스콘티도 프루스트 작품을 영화하하려다 실패했다고 하더군요. 대신 비스콘티가 쓴 시나리오는 프랑스 서점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안 봤어요 ㅠ.ㅠ)

한국어로 된 프루스트에 관한 비평, 전기적 자료들 (번역서, 논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품을 끝까지 읽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읽고 난 후에 뭔가 그에 대한 궁금증이 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서 우리말로 된 프루스트에 대한 글들을 뽑아보았습니다. 저의 편견과 독선으로 가득한 만큼 새겨 읽기 바랍니다. (2004년쯤 쓴 글을 그대로 퍼올리는거라 업데이트도 충분치 않고 제가 이곳에 올린 다른 글들과 겹치는 부분도 있을것 같군요. 양해 바랍니다)




가. 전기에 대하여

먼저 김창석 번역본의 각 권에 달린 역자 해제만으로도 프루스트의 삶에 대한 전반적 이해는 충분하리라고 봅니다. 물론 이 글들이 참조하고 있는 자료들이 상당히 오래된 것들이어서 현재의 연구에 의해 반박당할만한 부분들도 있고(부정확한게 꽤 많죠) 프루스트의 인생에 대한 지나친 신화화를 낳을 염려가 크지만 말이에요. (예컨대 프루스트가 코르크로 밀폐한 방에 틀어박혀 죽을 때까지 10여년 동안 이 책만 썼다는 주장의 경우, 맞는 말이지만 중요한 게 빠져 있습니다. 그 동안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저녁 사교계 모임에 참석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화낼 필요는 없습니다. 프루스트에 대한 신화화는 이미 그의 생전부터 있어서 그의 주변에는 근거 없는(?) 루머들이 언제나 무성했죠.

그 중 주요 루머를 살펴보면


(1) 그는 백만장자다! - 30대 초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가 물려받은 돈은 현재 화폐가치로 50-60억원쯤(!!) 밖에 안 됩니다. 물론 십여년만에 다 까먹었지만. 어쨌든 그는 당시의 그랑 부르주아들에 비하면 백만장자는 아니었죠,

(2) 그는 왕족(王族)들과만 교류한다 - 프루스트가 상류 사교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그가 어느 정도 등급의 상류 사교계에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결코 진정한 귀족 사교계에는 진출하지 못했다는 주장에서 웬만한 귀족 사교계까지는 갔다는 등 의견이 엇갈리죠. 쉽게 말해 감히 게르망트 공작부인이나 게르망트 대공부인의 사교계까지는 가지 못하고 스완 부인이나 베르뒤랭 부인의 살롱, 기껏해야 빌파리지 부인 정도까지 커버했다고 보면 무난하겠죠

(3) 그는 잠을 전혀 자지 않는다. 더구나 불을 꺼놓고 어둠 속에서 글을 쓴다 - 그는 완벽한 올빼미였습니다. 아침에 자서 밤 8시쯤에 일어났죠. 하지만 그래도 인간인데 잠은 자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불을 끄고 글을 썼다는 것은...

(4) 여기에 최후의 몇 년 동안 프루스트가 우유와 커피 밖에 먹지 않았다는 셀레스트 알바레의 진술도 빼놓을 수 없지요(이런 점 때문에 셀레스트의 증언에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겠죠). 가능한 설명은 집에서는 우유와 커피만 먹고 외출해서 사교계 모임에서 식사를 했다는거겠지만요.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김창석의 역자해제를 읽고 허황된 환상을 몇가지 더 품는다고 해서 크게 해로울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 프루스트에 관한 주목할만한 전기들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선 앙드레 모로아가 쓴 <프루스트를 찾아서>(정음사, 1993, 김창석 번역)가 있습니다. 출판된지 꽤 오래되어서 구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프루스트를 가까이에서 알았던 유명한 문인이 쓴 글 답게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엿볼 수 있지요. (<되찾은 시간>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질베르트와 생루의 딸인 어린 생루 양은 나중에 한 무명작가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 무명작가의 모델이 바로 앙드레 모로아입니다). 물론 워낙 옛날에 쓴 글이 되놔서 자료부족으로 인해 요즘 관점에서 보면 틀린 얘기들도 있지만 그래도 좋은 책임에 틀림없죠.



2000년에 나온 장 이브 타디에의 <프루스트>(책세상, ‘위대한 작가들’ 총서, 하태환 번역, 전2권)는 소르본의 프루스트 연구를 이끌고 있는 대가가 쓴 책답게 완벽히 실증적인 조사에 기반하여 그의 삶의 세부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김창석에 의해 유포된 환상들을 교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은 객관성에 압도되어 지루하기 짝이 없어요.(“나의 소르본 동료 아무개 A교수는 XX지방의 YY호텔의 옛 숙박부를 뒤져서 프루스트가 ZZ날짜에 이 호텔에 하루 머물렀다는 것을 발견해내는 대단한 발견을 거두었다”라는 식의. 또는 “나의 소르본 동료 B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B의 할아버지가 고등학교 때 프루스트를 강간했다고 한다. 역시 놀라운 발견이다!”는 식의).

이 책은 90년인가에 나온 그야말로 최신의 프루스트 전기지만 타디에 본인의 학자로서의 관점 때문에 나온 왜곡된 시선들이 상당히 있고, 지나치게 거리를 두고 있는 냉소적 시선이 거슬립니다. 거기에 하태환의 번역은 이 사람이 프루스트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형편없지요.


마지막으로 여기서도 몇 번 언급 되었던 셀레스트 알바레의 회고록 <나의 프루스트 씨>(조르주 벨몽 지음, 심민화 옮김, 시공사, 2003)는 프루스트가 <스완네 집 쪽으로>를 출간한 직후(1913)부터 그의 임종 때까지 그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헌신적인 가정부 셀레스트 알바레의 눈물겨운 증언록입니다.

프루스트 자신이 어머니와 셀레스트만을 사랑했다고 말할 정도로 작가의 깊은 신임과 애정을 받았던 여인의 글답게 진솔함과 충정이 넘쳐나는 이 책은(비록 애정이 지나쳐 몇 가지 왜곡이 생겨난 것 같기는 하지만) 프루스트의 창작 과정을 생생히 보여줄 수 있는 드문 예로서 프루스트에게 관심 이상의 마음을 품은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할겁니다.

이 셀레스트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악의적 중상도 없지 않은데, 예컨대 귀중한 프루스트의 원고를 태워버렸다거나 의사를 부르지 않고 접견을 허락하지 않아 프루스트를 죽게 내버려두었다거나 하는 등의 말이 그것인데, 이 일들 자체가 프루스트의 지시에 의해 실행된 일이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자체가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프루스트가 막상 죽으려니까 생색을 내려 했던 주변인사였다는 걸 감안해야겠죠.


이외에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조지 페인터의 <마르셀 프루스트> 역시 중요한 책입니다. 이 책은 프루스트에 관한 가장 유명한 전기인데, 이런 책을 영국인이 썼다는게 의아하게 생각될 지 모르지만, 사실 60년대에 롤랑 바르트가 공적으로는 모든 책에서 프루스트를 언급하고 사적으로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프루스트를 읽을 것을 <강요>하면서 돌아다니기 전까지는 프랑스에서 프루스트는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으며(오죽하면 구조주의 문학비평의 최대 공적이 프루스트를 재발견한 것이라는 말이 나올까) 오히려 영미권, 독일, 일본(한 때는 프루스트를 오직 일본에서만 연구하던 시절이 있었다는데,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등에서 더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지요(프루스트의 편지들을 모아서 <잃어버린 시간...>의 네다섯 배 분량으로 출판하고 있는 것도 콜프라는 미국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까페의 자료실에 콜프 사이트가 링크 되어 있습니다).

하여튼 조지 페인터의 전기는 영어가 좀 되는 분이라면 직접 읽기 바랍니다. 물론 불역본도 있고요. 주의할 점은 이 책이 프루스트의 인생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의 인생에 꿰어맞추려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이야기들은 비슷하지만 주요 흐름은 사실 크게 다른데 말이에요. 그래서 타디에의 전기가 가장 맹렬히 공박하는 것도 이러한 페인터의 관점이죠. (김창석의 해설은 전적으로 페인터의 전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기를 통해 볼 수 있는 인간 프루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의 주인공 사이의 유사성/차이에 대해 얘기하자면, 일단 프루스트는 절반 유태인이고 동성애자(혹은 그렇게 알려져 있죠)인데 반해 <잃어버린...>의 주인공 마르셀은 유태인도 아니고 동성애자도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가면 도대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동성애자가 아닌게 싶을 정도로 변태들 투성이인데 주인공은 언제나 이성애자이죠. 이 점은 작품의 해석에서 상당히 중요한 지점이 됩니다.

또 한가지는 프루스트가 부모님을 잃고나서 작품에 착수하는데 반해 마르셀의 부모는 신비스럽게 사라지며(어느 순간 이후로 갑자기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특히 아버지) 결코 죽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마르셀은 최종계시(‘되찾은 시간’에 나오는)에 이르기까지 결코 일(글쓰기)은 하지 않고 맨날 연애나 하고 사교계나 드나들면서 소일하는데 반해 프루스트는 남모르게 평생 무지많은 양의 글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책의 주인공 마르셀과 저자 프루스트의 삶을 동일시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나. 학문적 연구.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이니만큼 프루스트에 대한 연구를 모두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프루스트 때문에 절망에 빠져 몇년 동안 글을 쓰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하며 올더스 헉슬리, 콘래드, 포크너, 에드문드 후설 등도 프루스트의 애독자였고, 사무엘 베케트, 리쾨르, 크리스테바, 레비나스, 나보코프, 폴 드만 등은 프루스트에 대한 크고 작은 연구를 남긴 바 있습니다.


본격적 연구로는 먼저 가에탕 피콩의 <프루스트 읽기>(문학과 지성사, 1992)가 있습니다. 프루스트 연구의 고전이 된 책으로 약간 졸립고 지나치게 문학적인 문체가 거슬리긴 하지만 일독을 권합니다. 좋은 책이에요.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민음사, 1997)과 제라르 쥬네트의 <서사담론>(교보문고, 1992, 절판)을 빼놓을 수 없지요. 이 두 저작은 제가 보기에 지금까지 나온 프루스트 연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들뢰즈의 책은 방대하고 복잡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미학적 의도를 전체적 구도에서 주요 장면들과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몇 안되는 연구서입니다.

웬만한 걸작이 다 그렇지만 프루스트의 소설은 양 자체가 너무 많고 중심 주제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어서 전체적인 내용 정리를 하려면 들뢰즈의 책만한게 없죠. 사실 한국에서 이 책은 출간이나 수용 모두 들뢰즈를 중심으로 되고 있고, 그래서 프루스트를 모르고 들뢰즈만 아는 대다수 독자 입장에서는 어려운 책 취급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프루스트를 아는 독자라면 들뢰즈 철학에 대한 이해와 무관하게 대체적으로 술술 넘기면서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사실 들뢰즈는 프루스트를 이 책뿐 아니라 거의 모든 저작에서 언급하고 있을만큼 프루스트에 대한 애정이 깊죠. 철학책으로 번역되다 보니 문장이 조금 딱딱하기는 한데 그래도 큰 오역은 없는 편입니다.



쥬네트의 책은 서술학(narratology)에 입각한 전문적 연구인데다 번역마저 껄끄러워서 일반 독자가 접근하기에는 상당히 까다로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은 영역본을 중역한 것이어서 안 그래도 어려운 책이 두 배로 어려워진 케이스인데 일단 영역 자체에 문제가 좀 있고, 영역본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문제가 배가된 듯 해요.

몇몇 서술학적 개념어의 번역에서 터무니없는 오류가 발견되기는 하고, 프루스트의 작품에 대한 설명에서 딴 얘기를 하는 것으로 번역된 것도 꽤 있지만 번역자가 프루스트에는 문외한인 영문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고 보면 그래도 읽을만은 합니다(어차피 권택영이 번역할 때 대학원생들 시킨 것 같은데 프루스트 책을 번역판으로라도 읽은 사람에게 한번 읽히기만 했어도 백배는 좋아졌을텐데 아쉽습니다). 슬프게도 절판되었지만 도서관에서 구해 읽어볼만한 것이 지금껏 나온 프루스트에 관한 가장 꼼꼼한 독해라고 할만 하니까요.


이외에 한국의 독자들을 위한 훌륭한 선물이 있는데 바로 조종권 편역의 <마르셀 프루스트의 문학세계>(청록출판사, 1996)입니다. 아마 절판되었을 것 같군요.

이 책은 핵심적인 연구논문들을 번역해서 모아둔 것으로 여기에 전체가 완역되어 실린 조르주 풀레의 <프루스트의 공간>(들뢰즈, 쥬네트, 바르트의 연구에 영감을 불어넣은 대단한 책이죠), 롤랑 바르트의 <프루스트와 이름>, 필립 르죈느의 <에크리튀르와 성>, 장 피에르 리샤르의 <메로뱅 왕조의 밤> 등은 프루스트 팬이라면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훌륭한 연구들인데다 주제의식 자체가 워낙 독창적이고 탁월해서 지루해질 염려 없이 그야말로 신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간단히 내용을 요약하면

바르트의 '프루스트와 이름' - 1권 3부의 제목이 '고장의 이름 : 이름'이죠. 2권 2부의 제목은 '고장의 이름 : 고장'이고요. (원고 단계에서는 '사람의 이름 : 사람'이라는 장도 만들 계획이었는데 이 챕터 제목은 나중에 포기했죠). 주인공이 사람이나 고장을 직접 만나거나 방문하기 전에 이름만 듣고 꿈꾸는 테마에 관한 연구입니다.

르죈느의 '에크리튀르와 성' - 마들렌 과자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분석입니다. 마들렌=마리아=어머니라는 구도로 분석을 진행하죠.

리샤르 - '메로뱅 왕조의 밤' - 1권에서 몇 번 겨우 언급되는 사소한 테마(환등기의 골로, 쥬느비에브 드 브라방 등 작품 속에서 게르망뜨 가문의 조상으로 설정된 이들의 가계도..)를 확장해서 풀은 것인데 정말 천재적입니다.

풀레 - '프루스트의 공간' - 프루스트에게서 중요한것은 시간이 아니다 공간이라는 좀 엉뚱한 테제를 내세우는 책으로 프루스트 작품에 나타나는 '파편성' 개념을 적극적으로 파악한 최초의 연구입니다. 들뢰즈의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죠.


같은 책에 실린 루이 마르탱 쇼피에의 글 역시 기념비적 연구이지만 그 성과는 쥬네트의 책에서 모두 소화되어 있으므로 굳이 참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그리고 <프루스트와 현대 프랑스 소설>(민음사, 1999)이라는 책이 있는데 프루스트에 관한 국내 연구진의 논문들을 모은 것입니다. 여기서 맨 앞에 실린 김희영의 글은 꼭 읽을만 합니다. <프루스트 작품이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거야?>에 대한 가장 지배적인 두 관점(들뢰즈와 안느 앙리의 철학, 미학적 해석)을 체계적으로 비교해놓고 있죠.

그리고 이름은 기억이 잘 안나는데 (최순목? 조종권?) 같은 책에 실린 프루스트의 인물들이 사용하는 언어 문제에 대한 글도 주목할만 합니다. 글이 좋다기보다는 이 주제 자체가 워낙 중요하고 제라르 쥬네트의 기념비적인 논문 <프루스트와 간접언어> 이후로 프랑스에서 과도할 정도로 많이 연구되었기 때문이죠.

프루스트 DVD (프랑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루스트에 관한 DVD가 하나 있어 소개하도록 하죠.

이 dvd는 2장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Raoul Ruiz의 영화 '되찾은 시간(le temps retrouve)'의 dvd이고 다른 하나는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99년에 나온 Dvd Marcel Proust입니다. 합쳐서 'Tout l'univers de Proust'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고요.
프랑스에서는 이처럼 합본된 형태로만 판매되고 있고 영화만 구하려는 분은 미국판(지역번호 1번)의 time regained를 찾으셔야합니다.

아마존.fr의 dvd항목에서 proust로 검색
영화만 원하면 아마존닷컴에서 라울 루이즈로 검색.



영화 '되찾은 시간'은 전에도 가볍게 지나가면서 언급한 적이 있는 것 같으니 초호화 캐스팅에 영화도 무척 훌륭하다는 얘기만 하고 지나가도록 하죠.



다음은 자료 dvd인데요. 혹시 구입할 의사가 있으신 분이 있을지 모르니 말씀드리자면 한글 윈도우 XP에서 설치가 가능합니다. 물론 설치할 때 제어판에서 언어 부분을 프랑스어로 기본 설정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요. (설치하느라 고생 좀 했어요)

당연히 dvd의 내용은 모두 불어입니다. 영어자막도 없고요. (영화도 지역코드 2번입니다. 물론 영화의 경우에는 영어자막이 나옵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식의 작가에 대한 영상물이 흔하지 않아 낯설지 모르지만 프랑스에서는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인 텍스트 낭독 cd도 있고요(프루스트의 경우 얼마나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1권 '스완네 집쪽으로'는 아마 cd로 20장 가까운 분량으로 완결되었는데 이후로는 잘 모르겠네요). 최근 철학자들의 경우 인터뷰를 비디오/dvd로 출시하는 경우도 적지 않죠.



이 프루스트 dvd는 88년에 나온 플레이야드 판의 편집 책임자였던 장이브 타디에(책세상에서 나온 프루스트 전기의 저자)가 기획한 것으로 dvd라는 매체의 특성을 이용한 야심찬 기획으로 보이는데 야심만큼 실속이 있지는 않습니다.


내용물들을 대충 소개하면 (저도 조금 보다 말아서 확실치 않습니다. 메뉴가 편리하지 않아서 어떤 것들은 어디 들었는지 못찾겠더군요. 사용자 위주 인터페이스 개념이란게 프랑스에는 워낙 전무해서 말이죠).


- 장이브 타디에, 줄리아 크리스테바, 셀레스트 알바레 등이 프루스트에 대해 말하는 영상물
- 40분 분량의 음악(무슨 음악인지 확인하는대로 다시 알려드리죠).
- 작품 발췌문 음성 낭독 (30군데)
- 80여개의 테마 자료 (프루스트에게 영향을 끼친 여러 인물 및 작품 속 인물들, 장소들, 주요 주제들에 대한 개략적 설명)

그리고 모든 메뉴에 풍성한 사진/그림 자료가 동반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350점에 달하는 이 사진/그림들이 가장 마음에 드는군요.


한 마디로 말하면 시청각 자료가 가득하게 아주 잘 꾸민 인터넷 프루스트 사이트 하나를 dvd에 넣었다고 보면 될 것 같네요. (당연히 이 정도의 사이트는 없죠). 전문가가 만들었다지만 대중용 기획이다보니 특별한 내용적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불어가 된다면 대충 가지고 노는 재미는 쏠쏠할 것 같아요.

앞으로 시간이 되면 예쁜 사진들을 몇 개 올리도록 할께요.

프루스트의 서술방식에 관한 간단한 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루스트의 '생각나는대로 아무렇게나 쓴 것처럼 보이는' 서술 방식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란다 사브리의 '담화의 놀이들'에서 그대로 퍼왔습니다. 프루스트 연구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장 명쾌하게 이 부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제1권 1부의 중간 열페이지 정도의 분절방식입니다. 


예컨대 베르고트라는 인물이 어떻게 도입되는지를 살펴보면 프루스트가 일반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으로, 대낮의 독서에서 베르고트의 책으로 나아가는 단순한 구조 대신에 두 개의 확장을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블로크를 통한 확장이고 다른 하나는 스완을 통한 확장인데, 이 두 확장은 서로 연결된 동시에 베르고트 시퀀스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은 (1)주제론적 연관(블로크와 스완 모두 화자에게 베르고트의 작품을 소개해준다)에 의해, (2)그리고 일련의 흐르는 운동을 통해 실행된다. 이 흐르는 운동은 다음과 같다.

― 일상적인 독서의 나날들의 관절부에서 베르고트라는‘완전히 새로운 작가’에 대한 스완의 언급으로 특징지어지는 특별한 하루가 예고된다.

― 즉시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내가 처음으로 베르고트에 대해 들은 것은 급우인 블로크를 통해서였다”(p. 90).
(→이야기 속에 처음 등장한 블로크에 대한 확장부. 이 단락은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블로크-베르고트의 결합을 통해 끝난다)

― “하지만 베르고트에 대해서 블로크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p. 93).
(→베르고트의 책들에 대한 확장부. 이 확장부는 베르고트-블로크-스완 세 명이 결합되고 앞에서 예고한 특별한 하루로 복귀하면서 끝난다)

― “어느 일요일에 나는 정원에서 책을 읽다가 스완이 내 부모님을 만나러 오는 바람에 방해를 받았다.
― 뭘 읽고 있나? 좀 봐도 되겠니? 어, 베르고트 책이로군. 누가 그의 작품을 알려주었지? 나는 블로크가 베르고트를 알려주었다고 스완에게 대답했다.
― 아! 맞아, 내가 전에 이 집에서 한번 본 그 친구 말이군. 그 친구 벨리니가 그린 마호멧 2세의 초상화랑 꽤나 닮았던데. (……) 어쨌거나 그 친구 취향이 괜찮군. 베르고트는 멋진 사람이란 말이야.”(p. 97).
(→베르고트에 대한 스완의 논평에 대한 확장부)

1권 '스완네 집 쪽으로' 맨 앞 구절 읽기 (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글 앞에 붙인 후기) 

글을 쓰던 중에 생각이 난건데 민음사에서 나온 프루스트와 현대 프랑스 문학이라는 책에 최순목 교수였나 누군가가 <스완>의 앞쪽을 분석한 글이 있었지요. 분명 예전에 도서관에서 대충 훑어보긴 했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군요(앗, 그 책이 아니었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여기서 해보려는 것도 <잃어버린...>의 첫 문단의 해석인데요. 잘 될지 모르겠군요. 여담이 많아지다보면 아주 길어질 수도 있는데 현재로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지금까지 제가 쓴 글들이 전부 그랬듯이 이 글에도 제 개인적인 생각과 제가 읽은 많은 연구자들의 생각이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전부 각주 달면서 인용하기에는 너무 번거로와서 그냥 씁니다. 사실 지금은 누구 글에서 읽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채로 머리속에 들어있는 것이 많고요. 모쪼록 스크롤의 압박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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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분석할 때 반드시 필요한 단계로 소설의 시작 부분에 대한 검토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첫 문장, 첫 문단, 처음 몇 페이지는 침묵의 공간에서 언어와 이야기의 공간으로 옮겨가는 장소, 독자가 자신의 현실에서 허구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전략적 장소인만큼 작가들은 작품의 시작 부분에 대단한 공을 들이게 마련입니다. 

프루스트의 경우 각 권의 시작과 끝부분을 너무나 인상적으로 장식해놓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체의 시작 부분인 <스완네 집쪽으로>의 앞부분은 당연히 대충 쓰지 않았겠지요. 실제로 <잃어버린...>을 처음 읽기 시작할 때 가장 어렵고 지루하고 현기증 나는 것이 1권의 1부인 <꽁브레>이지만 책을 끝까지 읽은 후에 다시 보면 작품 전체에 나오는 모든 테마가 숨어 있고, 거의 모든 인물이 언급되거나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읽을 때 어려운게 당연한거죠. 물론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기도 하지만요. 




*** 




200페이지 남짓한 1권의 1부 <꽁브레>를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눠보죠. 

우선 공식적으로 1부는 <I>과 <II>라는 번호로 두 개로 나뉩니다. 마들렌의 일화가 끝난 후 본격적으로 꽁브레 시절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II> 부분이죠. <II>는 분량도 상대적으로 길고 워낙 많은 이야기가 있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 50쪽 정도 되는 <I>를 먼저 보죠.

<I>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우선 맨 앞의 일곱 페이지 정도(a)에서 불면증에 걸린 화자의 상황과 그가 예전에 묵었던 여러 방들의 추억이 서술됩니다. 다음에 “꽁브레에서는”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20-30쪽 정도의 파트(b)가 있는데 이 부분은 기본적으로 집안 풍경을 소개하면서 ‘잠자리의 드라마’로 끝납니다. 마지막 파트(c)는 다섯쪽 정도로 켈트인 신앙에 관한 언급과 유명한 마들렌의 일화로 마무리됩니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대충 정리해보죠. (a, b, c는 책 안에서는 한 줄 띈 것으로 구획되어 있고 알파벳은 제가 넣은 것입니다) 



<스완네 집쪽으로>(잃시찾 전체 일곱 권 중 첫 권) 

1부 <꽁브레> 

I. (a) 불면증에 걸린 화자 (일곱쪽 가량)) 
   (b) 꽁브레에 대한 첫 소묘 (35쪽 가량) 
   (c) 마들렌 과자의 일화 (다섯쪽 가량) 
II. 본격적인 꽁브레 이야기 (약 140쪽)

2부 <스완의 사랑> (약 200쪽)

3부 <고장의 이름 : 이름> (약 50쪽)


total : 잃시찾의 1권 <스완네 집 쪽으로> 약 4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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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a-b-c 사이의 분절을 살펴보죠. 



(a) 파트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납니다. 
‘평소에 나는 금방 자려고 하는 대신, 지나간 옛날 우리집 생활, 꽁브레의 왕고모 댁에서, 발베크, 빠리, 동시에르에서 (...) 보낸 생활을 회상하거나 (...) 그리면서 밤의 대부분을 지새우곤 했다’ 


그리고 바로 뒤를 이어 나오는 (b)파트는 꽁브레에 대한 첫 소묘입니다. 이 책에서 꽁브레 이전의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으므로 꽁브레는 화자의 기억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죠. 


한편 (b)파트는 잠자리의 드라마로 끝나고 (c)파트는 ‘자발적 기억’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b)파트에서 꽁브레에 대한 이야기를 꽤 했지만 그 이상은 더 기억이 안 난다는거지요. 그러면 과연 그 기억은 영영 잃어버린 것인가?하는 자문에 뒤이어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이나 시절에 관한 기억이 사물 속에 숨어있다가 우리가 우연히 그 사물에 부딪히면 그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켈트인의 신화가 소개되고 곧바로 마들렌의 일화가 나옵니다. 마들렌이 바로 켈트인들의 말한 기억의 매개체였던 것이죠. 이제 주인공은 마들렌 과자의 도움으로 ‘비자발적 기억’이 되살아나 자신의 모든 과거를, 전인생을 기억해냅니다. 이제 이야기는 시작되지요. 이것으로 <꽁브레>의 <I>이 끝나고 꽁브레의 성당에 관한 구절로 시작하는 <II>에서는 화자의 유년기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히 시작됩니다. 




사족 :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지 몰라 미리 얘기하죠. 꽁브레에 대한 첫 소묘인 b파트는 기묘한 구성을 안고 있습니다. 불과 30쪽 조금 넘는 이 파트에서 스완의 방문 장면이 두 번 반복되는 것이죠. 상당부분은 거의 똑같은 문장으로 되어 있고요. 결국 맨 처음 꽁브레를 언급할 때 스완의 방문(과 어머니와의 이별)로 시작하고 이 파트는 결국 이 방문에 대한 상세한 서술로 매듭지어지지요. 한번 다시 읽어보시길. 


두번째 사족 : 제가 위에 정리해놓은 1권의 분절을 따라 각 파트의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만 찾아서 비교해보면서 한번 읽어보세요. 프루스트가 얼마나 지독한 인간인지 깨달으실 수 있을거에요. 



*** 




예. 이야기 한번 시작하기 정말 어렵죠?꽁브레의 유년기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화자는 세번이나 멈췄으니까요. 하지만 아직도 이야기가 제대로 시작한 것은 아니랍니다. 

<I>의 (a)와 (c)에서 나왔던 ‘중년의 불면증 환자-화자’는 <II>가 끝날 때 다시 나옵니다. 그러면서 1부 <꽁브레>가 끝나고 2부 <스완의 사랑>이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되지요. 3부 <고장의 이름 : 이름>에서는 이 ‘불면증에 걸린 화자’가 다시 나옵니다. 3부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내가 가장 자주 회상했던 방들 중에서...”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지요. 그러면서 샹젤리제 산책에서 만난 질베르트와의 첫 연애 이야기가 나오고요. 그리고 3부의 마지막 일곱 페이지에 다시 이 ‘불면증 화자’가 나타나서 이제는 영영 가버린 옛 시절에 대한 아쉬움을 표시합니다. “어떤 이미지에 대한 회상이란 어떤 한 순간에 대한 그리움에 지나지 않는다. 가옥들도 길도 시가지도 덧없는 것, 아아! 세월처럼”이라는 문장으로 3부는 끝납니다. <스완네 집쪽으로>가 끝난거죠. 그리고 2권인 <꽃피는 소녀들의 그늘에>서부터는 이제 이 ‘불면증에 걸린 화자’가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쥬네트가 지적한 것처럼 서구 문학에는 ‘이야기 시작의 어려움’이라는 전통이 있는데 <스완네 집쪽으로>만큼 이 현상을 극명히 보여주는 작품도 드물지요. 처음에는 자기 과거가 생각 안 난다고 고생하고 그 후에도 자꾸 회상의 주체인 중년의 화자가 끼어들면서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식으로 <이야기>는 진짜로 시작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제1권이 끝난 후에야 이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발진하기 시작하고... 일단 시동이 걸린 이상 다시는 멈추지 않고 2천페이지를 달려갑니다. <꽁브레>에 지친 독자입장에서는 이제 전통적 소설을 읽는 것처럼 스토리만 따라가면 되지요. 다행이죠. 물론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에서 또 한번의 악몽이 기다리고 있다는걸 모르는 상태라면요. 

***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1권 1부의 I의 (a) 파트, 즉 책 맨 처음의 일곱 페이지 가량을 살펴보기로 하죠. 아니, 맨 첫 페이지부터 시작합니다. 제가 번역한 조악한 첫 문단을 넣도록 하죠.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다. 가끔은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바로 감겨서 “잠드는구나”하고 중얼거릴 시간마저 없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반시간이 지난 후, 자야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나를 깨우곤 했다. 나는 아직 책을 손에 들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 책을 내려놓고 입김을 불어 불을 끄고 싶었다. 나는 잠을 자면서도 끊임없이 조금 전에 읽고 있던 책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생각은 약간 이상한 모양이 되곤 했다. 그래서 성당, 4중주, 프랑스와 1세와 샤를르 5세의 대결 등 책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나 자신인 것 같았다. 이러한 믿음은 잠에서 깬 후에도 몇 초 동안 남아 있곤 했다. 내 이성은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놀라지 않았고 이 믿음은 비늘처럼 눈 위를 눌러서 내 눈은 양초가 지금 꺼져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윤회를 거친 후에 전생의 생각들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이 믿음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기 시작했다. 이제 책의 주제는 나와 분리되어 나는 내 마음대로 그 주제에 몰두하거나 몰두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곧이어 나는 시력을 회복하여 내 주변이 깜깜한 것에 놀라는데, 그 어둠obscurité은 내 눈에 부드럽고 아늑하지만 내 정신에는 진정 모호한obscur 사물인양 까닭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서 더욱 부드럽고 아늑한 것 같았다. 나는 지금이 몇 시일까 자문해보았다. 꽤 멀리서 열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 숲 속의 새의 노래처럼 거리를 알리면서 나에게 여행자가 다음 역을 향해 황급히 가고 있는 텅빈 들판의 넓이를 그려 보였다. 새로운 장소, 익숙치않은 행위, 밤의 적막함 속에서 아직도 생생한 남의 집 전등 밑에서 조금전에 나누던 잡담이나 작별의 인사말, 머지 않은 귀가의 즐거움 등 때문에 여행자가 가고 있는 이 작은 길은 그의 추억 속에 깊이 새겨질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곤했다(Longtemps, je me suis couche de bonne heure)’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이 간단한 첫 문장에는 ‘시간’, ‘나’, ‘잠’이라는 세 테마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세 테마는 소설의 서술적 틀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소들이기도 하죠. 이미 설명한 것처럼 불면증(잠)에 빠진 주인공이 밤중에 자신(자아)의 과거를 회상(시간)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서술되니까요. 


여담이지만 이 작품이 전반적으로 악명높은 긴 문장으로 가득차 있는데 반해(소설의 마지막 문장만 해도 굉장히 길죠) 이 앞부분은 짤막한 문장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불어 원문을 보면 어휘면에서도 굉장히 쉬운 단어들을 사용해서 아주 간결한 문체를 만들고 있죠. 심하게 말하면 맨 처음 일곱 문장 정도에 나오는 모든 단어는 ‘시간’, ‘나’, ‘잠’, ‘빛/어둠’, ‘책’이라는 테마로 환원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첫 단어는 ‘오랫동안longtemps’입니다. 정확한 불어라면 ‘Pendant longtemps’이 맞겠지만 프루스트는 전체 제목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염두에 두고 소설의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를 모두 시간에 관한 단어로 장식하고 싶었던지 ‘pendant’를 빼고 그냥 ‘longtemps’으로 갑니다.. 

아시다시피 <되찾은 시간>의 마지막 단어는 대문자로 된 ‘시간(Temps)’이지요. 1권 <스완네 집쪽으로>의 마지막 단어는 ‘세월(les annees)’이고요. 그 외에도 시간에 관련된 단어들은 실제로 소설의 앞부분에 과다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첫 문장에 벌써 ‘오랫동안(longtemps)’과 ‘일찍(de bonne heure)’가 있고요. 두번째와 세번째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가끔은>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바로 감겨서 “잠드는구나”하고 중얼거릴 <시간>마저 없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반시간>이 지난 후, 자야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나를 깨우곤 했다). 




첫 문장에 나오는 또다른 테마인 ‘잠(睡眠)’과 ‘나’는 첫 문단 전체를 이끄는 메인 테마가 됩니다. 여기서 잠에 들려고 하는 ‘나’는 누구일까요? 전에 ‘이름’에 관한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것처럼 독자는 주인공-서술자의 이름을 <갇힌 여인>에 가서야 (가정법으로) 두세번 듣게 될 뿐 책 내내 그의 이름을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이냐보다는 그가 ‘언제’의 ‘나’이냐 하는 것이죠. 



앞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면증에 걸린 중년의 화자’가 자신의 유년기를 회상하는 것이 <꽁브레>의 서술 액자입니다. 다시 말해 1인칭 서술인 이 소설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서술자와 그의 과거인 어린(젊은) 주인공이 구별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불면증 시절이 진짜 서술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죠.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1권 전체에 걸쳐 대여섯번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진행을 자꾸 중단시키는 불면증 환자에 관한 대목은 과거시제로 쓰여 있습니다. 

즉 더 이후의 서술자가 불면증에 걸려있던 시절을 회상하는데 이 불면증 환자가 유년기를 회상하는 것이죠. 한 마디로 이중 회상 구조입니다. 여기에 마들렌 과자의 일화가 나오는데 이 장면 역시 과거 시제입니다. 



책의 맨 앞쪽 50쪽 정도를 꼼꼼히 다시 읽으시길 부탁드리면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정리해보면요. 시기적으로 볼 때 (가)<유년기-청년기의 주인공>(책의 줄거리)---(나)<불면증에 걸려 과거를 회상하는 주인공>--(다)<불면증에 걸려 과거를 회상하던 시절을 회상하여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서술자>로 나눌 수 있고요. 마들렌 과자의 일화는 두번째와 세번째 사이의 어딘가에 넣어야할 겁니다. ‘어딘가’라고 말한 것은 그 부분이 시기적으로 명확하지 않아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해답이 안 나왔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첫 문장서부터 시작되는 몇 페이지는 (나)를 회상하는 (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죠. 



*** 



첫 문장서부터 대뜸 ‘나’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소설에서 1인칭을 사용하는 것은 프루스트 이전에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루스트 이후 그 의미는 많이 달라집니다. 

일단 전통적인 3인칭 전지적 시점과 프루스트와 같은 1인칭의 차이를 생각해보죠. 3인칭 서술의 경우 설사 과거 시제로 기술된다 해도 거기에 ‘과거’의 의미는 크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살고있는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측면이 강하죠. 그리고 서술자는 자연히 이야기의 내용에 대해 거리를 두게 됩니다. 반대로 1인칭에서 서술되는 내용은 서술자의 과거이고 따라서 서술의 순간과 사건의 순간 사이에는 강력한 연관성이 존재합니다. 더구나 마치 서술자 없이 저절로 얘기되는 듯한 3인칭 서술과는 달리 1인칭 서술에서 (아무래도 자기 얘기를 하다보니) 서술자는 그렇게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을 뿐더러 현재 서술하고 있는 순간이 과거의 사건만큼이나 중요하게 되죠. 

한 마디로 3인칭 서술에서 과거시제는 과거의 의미라기보다는 그냥 이야기 서술의 관습에 가깝습니다. (불어의 경우에는 정통적인 소설에서 이럴 때 단순과거 시제를 쓰는데 이 시제는 불어에서 역사책과 소설책에서만 사용되는 시제죠). 반대로 1인칭 서술의 과거시제는 서술자가 말을 하고 있는 현재 시제에 대한 과거 시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1인칭 서술에서 이야기의 내용(과거)과 서술자의 현재가 책 끝에서 만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프루스트는 서술의 내용과 서술의 과정을 끊임없이 미묘하게 어긋나게 만들면서 1인칭의 이러한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밀고나갑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과거-잃어버린 시간’과 ‘서술자-현재-되찾은 시간’의 대립이 작품의 구도에 정확히 부합한다는 것이죠. 



다시 첫문장을 살펴보죠. 정확히 직역하면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다”라고 했죠. 여기서 ‘-하곤 했다’라는 <습관>의 의미는 불어에서 시제만으로 표시됩니다. se coucher라는 동사인데 직역하면 ‘눕다’이고 속뜻은 ‘잠자리에 들다’, ‘자러 가다’가 됩니다. 



그런데 너무 일찍 잠든다는 것은 몸이 아프거나 병적인 성격일 때나 하는 일이죠. 과연 두세문장 뒤에 화자가 불면증이라는 병을 앓고있음이 밝혀집니다. 이 불면증은 작품의 서술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a) 파트의 마지막 문장인 ‘평소에 나는 금방 자려고 하는 대신, 지나간 옛날 우리집 생활, 꽁브레의 왕고모 댁에서, 발베크, 빠리, 동시에르에서 (...) 보낸 생활을 회상하거나 (...) 그리면서 밤의 대부분을 지새우곤 했다’를 보면 알겠지만 불면증은 주인공이 회상을 하는, 우리가 읽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모태가 됩니다. 



지금 저는 불면증을 ‘병’이라고 말했습니다. 책의 두번째 문단을 보면 이미 불면증에 걸려 호텔직원이 오기를 기다리는 “병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형적인 신경증 증세인데 ‘일찍 잠자리에 든다’는 것은 이렇게 불면증을 피하려고 일찍 잠자리에 들려하는 주인공의 습관(첫 문장)이나 ‘잘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에 자다가 깨어나는’(세번째 문장) 것을 보면 이런 신경증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은 어린아이의 습관이기도 합니다. 정확히는 꽁브레에서 주인공이 저녁 8시면 벌써 취침을 강요당하죠. 그리고 그로부터 ‘잠자리의 드라마’가 나오고요. 결국 첫 문장은 꽁브레를, 꽁브레를 요약하는 ‘잠자리의 드라마’를 다시 요약-예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잠자리에 든다는건 당연히 침대에 눕는다는 것이겠죠? 

(a) 파트 전체가 불면증에 대해, 잠에서 깨어나서 이곳이 어느 방인지 몰라하는 주인공에 대해 말하고 있으므로 침대-잠의 테마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잠에서 깬 순간 과거에 묵었던 수많은 침실 중 어느 침실에 자기가 지금 있는지 몰라 헷갈려하는 주인공의 혼란에서 ‘회상’이 시작되므로 침대는 또한 이야기 서술의 장소입니다(앞에서 인용한 a파트의 마지막 문장 참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마들렌 과자를 건네주던 레오니 고모는 늘 침대에서 살고 있고, ‘잠자리의 드라마’에서 어머니의 키스를 받는 것도 침대이고, 할머니가 죽는 것도 침대이고, 잠자는 알베르틴을 보는 것도 침대이죠. 무엇보다 주인공이 책을 읽는 곳, 나중에 책을 쓰는 곳도 침대이죠. 실제로 프루스트 자신도 침대에 누워서 글을 썼고요. 



너무 일찍 잠자리에 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죠. 따라서 첫 문장의 ‘일찍 자기’는 ‘잃어버린 시간’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어로 번역한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들곤 했다”라는 문장에서는 그 뜻이 나타나지 않지만 불어원문에서는 이것이 완료시제여서 ‘지금은 일찍 자지 않는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지요. 


예. 짐작하셨겠지요. ‘일찍 자기’-‘시간을 잃어버리기’에서 ‘밤에 자지 않고 일하기’-‘시간을 되찾기’로의 전환이 있습니다. 이 전환이 바로 소설 전체를 요약하고 있고요. <되찾은 시간>에서 주인공은 자기가 책을 쓰기 시작하면 오직 밤에만 일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죠. 



결국 첫 문장의 ‘일찍 자기’-‘유년기의 잠자리의 드라마’-‘잃어버린 시간’- "병적인 신경증적인 불면증의 밤"은 소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극복됩니다. 그 슬프고 외로운 밤시간이 창작과 노동의 행복한 고독으로 뒤바뀌는것이죠. 그리고 여기에 다다르기 위해 주인공은 평생(바로 첫 단어인 "오랫동안"이죠)을 살아야했고 우리는 2천 페이지 이상을 읽어야 했습니다.


*** 



앞의 다섯 문장이 첫 문장에 대한 해석 속에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으니 이제 소설의 여섯번째 문장을 보죠. 필요하면 다시 앞의 문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서 성당, 4중주, 프랑수와 1세와 샤를 5세의 대결 등 책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나 자신인 것 같았다.’ 



먼저 나 자신이 책의 내용이 된다는 것은 주인공-서술자의 인생에서 ‘책’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단적으로 예고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앞쪽에서는 그리 부각되지 않지만 작품이 끝날 때가 되면 주인공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남은 인생을 전부 바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인생이 책의 주제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지요.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작가가 되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고 책을 두번째 읽으면 확연히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작품 속에는 예술과 관련된 테마들이 무수히 많이 심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서 말하는 책의 내용(성당, 4중주, 프랑수와 1세와 샤를 5세의 대결)을 살펴보도록 하죠. 우리는 이 작품에서 성당과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4중주는 당연히 뱅퇴이유의 7중주를 연상시키지요. 뱅퇴이유의 음악은 스완의 사랑에서뿐 아니라 이후 작가가 되려는 주인공의 미학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성당(eglise)은... 우선 <되찾은 시간>에서 프루스트가 작품 전체를 설명하기 위해 대성당(cathedrale)의 은유를 사용하죠. 또 꽁브레는 성당으로 요약될 수 있고 아가위 꽃에 처음 반하는 것도 꽁브레의 성당에서이고, 발베크에 가보고 싶었던 것은 스완이 말해준 페르시아풍 성당 때문이고 나중에 마들렌 과자와 비슷한 기억의 소생이 다시 한번 시작될 때 그 매개체는 베니스의 산마르코 성당에서 밟았던 포석(布石)이죠. 

여담이지만 현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정본은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온 플레이야드 판인데 같은 출판사에서 포켓판인 folio총서로 플레이야드와 (일부 부록을 제외하고는) 똑같이 찍고 있지요.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폴리오판의 <잃어버린...>의 표지는 모두 모네의 대성당 그림 연작입니다. 


마지막으로 ‘프랑수와 1세와 샤를 5세의 권력투쟁’은 실제로 이런 제목의 책이 존재하기도 했고 (샤를 5세Charles Quint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5세'입니다) 프루스트가 읽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조금 생각을 바꿔보면 곧이어 나올 잠자리의 드라마에 대한 은유로 볼 수도 있을겁니다. <꽁브레>의 앞쪽에서 매일밤 어머니와 키스해야만 잠에 들던 ‘나’는 스완의 방문으로 어머니를 보지 못하죠. 문제의 밤에 주인공은 고집을 부려 결국에는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자는데 이때 어머니가 읽어주는 책이 조르쥬 상드의 ‘사생아 프랑수와’입니다. 

예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사생아 프랑수와’의 내용은 마들렌이라는 여인이 프랑수와라는 버려진 아이를 키우다가 나중에 결혼한다는 것이죠. 예. 완벽한 근친상간의 테마입니다. 오이디푸스 구도로 생각해본다면 잠자리의 드라마에서 어머니를 막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스완인데, 샤를 스완(샤를 5세) - 어머니(마들렌) - 나(프랑수와/프랑스와 1세)의 삼각관계를 둘러싸고 ‘사생아 프랑수와’와 ‘프랑수와 1세와 샤를 5세의 투쟁’이라는 두 개의 책이 겹쳐집니다. 잠자리의 드라마 바로 다음에 ‘마들렌’ 과자의 일화가 나온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겠고요. 



한마디로 <되찾은 시간>에 나오는 "내 인생이 내 책의 소재가 될 것이다"와 같은 말을 고려해보면 "나는 책의 내용이 되었다"라는 이 문장은 뱅퇴이유의 음악, 대성당, 잠자리 드라마 같은 인생 경험과 미학적 경험이 주인공의 인생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책이 될 것이라는 과정을 명확히 예고하고 있죠.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요)

잃시찾 내적 연대기 (연도별 정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불어 위키페디아 프루스트 코너에 연결된 꼭지로 잃시찾 연대기가 올라와 있더군요.

이 연대기의 바탕이 된 논문들은(60년대에 하나 있었고 80년대초에 또 하나 나왔죠) 제가 어쩌다보니 못 구했던 건데요. (문제는 88년에 판본쇄신이 이뤄진 바람에 이 연대기도 수정이 되어야 하는데 그 후론 이런 작업을 하는 연구자가 없다는 거죠)


빠진 것도 많고 (생루의 동시에르 시절 등) 약간의 문제는 보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테니 자료상 올려두렵니다. (그대로 번역하고 제가 약간 첨언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연도는 작품에서 언급된 역사적 사건들에 기반하여 재구성된 겁니다.

프루스트는 작품 속에서 연도를 명시적으로 밝히는 일이 거의 없거든요.


방대한 작품인데다 프루스트가 완성을 못하고 죽어 당연히 연대기에는 내적 모순이 많습니다.

코타르만 해도 6권에서 죽었다가 7권에 또 나오거든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내적 연대기(연도별 사건)


서술자는 편의상 마르셀이라고 칭합니다.



 

1879

마르셀의 부모 결혼

스완은 오데트를 알게 된다.

그 해 말에 스완은 오데트와 카틀레야를 한다.

 

1880

스완과 오데트의 관계가 식는다.

6 : 스완은 생퇴베르트부인의 파티에서 뱅퇴유의 소악절을 다시 듣는다.

7 : 마르셀 출생

10-11 : 알베르틴과 꽃피는 아가씨들 출생모렐뱅퇴유 양질베르트 출생

그해말에서 다음해 초 : 오데트는 2년간의 지중해 유람선 여행을 떠난다

 

1881

그 해초 스완은 합승마차에서 코타르 부인을 만나 오데트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스완의 질투심은 가라앉는다스완은 콩브레로 가서 캉브르메르-르그랑댕 부인을 만난다.

 

1885

레오니 고모가 매년 겨울을 파리에서 보내는지라 마르셀은 어머니와 함께 설날 인사를 드리러 간다마르셀은 프랑수아즈(하녀)에게 5프랑을 줘야 한다.

 

1888

마르셀은 아돌프 종조부 집에 놀러갔는데 오데트가 와있었다. (분홍색옷의 여인  국역본에는 장미색으로 되어 있을듯). 이 일로 아돌프는 집안에서 배척받고 콩브레에 더 못 오게 된다

 

1889

스완은 오데트와 결혼한다. (오데트에 대한 사랑은 식었지만 오데트가 질베르트를 무기로 협박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결혼함)

 

1890

스완이 방문하는 날이면 마르셀은 엄마에게 키스를 받지 못하고 자러 가야 한다. 스완은 아직은 사교계에서 빵빵하게 잘 나감. (영국황태자나 프랑스 대통령이랑 둘이 밥먹는 정도는 일도 아님)

 

1892

콩브레에서 보내는 휴가들마르셀은 탕송빌쪽(스완네집쪽산책길에서 질베르트를 본다.마르셀은 페르스피에 의사의 딸의 결혼식에 갔다가 게르망트 부인을 본다파리에서는 스완 부인을 본다.

 

1894

뱅퇴이유의 딸의 동성애는 마을에서 추문을 일으킨다마르셀(14)은 자위를 한다마르셀은 레오니 고모의 소파에서 사촌여자애와 첫 섹스를 한다가을에 레오니는 죽고 마르셀은 유산을 물려받는다마르셀은 오귀스탱 티에리의 책을 읽는다프랑수아즈는 이제 마르셀네 집안에서 일한다.

 

1895

연초에 마르셀(15)은 피렌체와 베네치아에 가보고 싶어하지만 병으로 단념한다.

샹젤리제에서 질베르트를 알게 된다.

라베르마를 보러 극장에 간다.

노르프와 씨가 식사하러 집에 온다.

 

1896

1 1 : 마르셀은 질베르트에게 새로운 우정을 쌓자고 제안한다하지만 행복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관계는 곧 식는다.
10 : 마르셀은 아직도 질베르트네 식구들과 외출을 한다.

이 시기에 블로크가 마르셀(16)을 매춘부에게 데려간다

 

1897

1 1 : 마르셀은 질베르트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을 확인한다.

6-7 : 레오니 고모의모친의 장례 때문에 콩브레에 간다산책을 나갔다가 몽주뱅에서 뱅퇴유 양과 그녀의 여자애인이 저지르는짓(아버지 사진에 침뱉기)을 몰래 본다.

8 : 할머니와 발벡에 갔다가 꽃피는 소녀들과 알게 된다.

11 : 드레퓌스 사건 시작.

마르셀네 집은 이사를 간다. 게르망트 공작부인과 같은 건물에 살게된다.

마르셀은 오페라 극장에 갔다가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본다그는 처음엔 스완 부인을 다음엔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사랑한다.

이때쯤부터 마르셀은 게르망트 공작부인 스토킹 시작.
 


1898

부활절 경 : 마르셀은 생루와 함께 생루의 정부를 만나러 간다.
빌르파리지 부인네 파티에 초대받는다. 이 파티에서 샤를뤼스는 마르셀에게 이상한 제안을 한다.

6
 : 할머니의 사망마르셀은 11월에야 사교계 생활을 재개한다.

겨울 : 마르셀은 게르망트 공작부인네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이후 오리안느와 친해진다.

 

1899

게르망트 대공부인의 파티에 초대받는다샤를뤼스와 쥐피앙이 아날섹스하는것을 목격한다.

스완은 병으로 죽어간다.

 

1900

의사의 명령으로 마르셀(20)은 발벡에 다시 간다샤를뤼스는 동시에르에서 군복무중인 모렐(20)과 알게 된다라스펠리에르에서 모렐은 드뷔시의 축제를연주한다마르셀과 알베르틴은 베르뒤랭네 드나든다(20년전에스완과 오데트도 이 집을 드나들었다).

마르셀은 915일까지 발벡에 머무른다이 날 이후로 알베르틴은 파리의 마르셀집에 기거한다.

 

** 프루스트의 죽음으로 제5갇힌여인부터 마지막 권까지는 연대기가 엉망이다. (물론그 전에도 이 연대기에는 모순되는 점이 꽤 있었다.)

 

1901

마르셀은 (엄마도 같이 사는 집에서알베르틴과 동거한다.

그해초(겨울) :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방문한다샤를뤼스는 62세이다.

알베르틴은 마르셀을 완전히 떠난다마르셀은 어린 여자애 하나를 집에 데려왔다가 미성년자 납치죄로 고발당한다.

 : 알베르틴은 사고로 죽는다.

만성절(11월초경이 되면 마르셀은 이제 알베르틴 때문에 더 힘들어하지 않고 그녀를 잊기 시작한다.

 

1902

연초 : 앙드레와의 대화 (및 '반쯤 육체적인' 관계)

 : 엄마랑 베니스에 놀러간다빌르파리지부인과 노르프와를 만난다둘 다 80세는 되었다마르셀은 17세의 유리장사 소녀에게 반한다. (발벡에서 만났을 때 알베르틴이 17세였다). 질베르트는 생루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려온다. (전보교환원의 오타로 마르셀은 알베르틴이 살아돌아온줄 안다)

여름 : 세번째 발벡 체류질베르트임신

 

1903


마르셀은 탕송빌에 체류하다 공쿠르 형제의 일기를 읽고 문학에 실망을 느껴 요양원에 들어간다. 
질베르트는 딸을 출산(생루 양).  


1904-1914

마르셀은 요양원에 들어간다. 파리에는 이후 가끔 나온다.


1914

1차대전 발발
전쟁 때문에 질베르트는 콩브레로 간다
마르셀은 잠시 파리에 나온다


 

1916
연초 : 마르셀은 파리로 온다. 생루를 만나고 샤를뤼스의 SM 행각을 목격한다.

생루는 전사한다콩브레에서 장례식이 치뤄진다.

베르뒤랭이 죽고 베르뒤랭 부인은 돈이 떨어진 게르망트 대공과 재혼한다


1917

마르셀은 샤를뤼스를 만난다.

 

1918

11 : 마르셀은 불로뉴숲을 거닐며 향수에 빠진다

 

1919

연초 : 마르셀은 병으로 아프다마들렌과자를 먹고 콩브레를 떠올린다.

5-6 : 요양원에서 나온 마르셀(39)은 게르망트 대공부인의 마티네에 간다그는 계시를받고 을 쓰기로 한다.

 

** 1922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 사망 **

 

1927

샤를뤼스 사망. 우리의 나레이터 마르셀은 이때도 열라 책을 쓰고 있음. 

 

 

 


장 상퇴이유 초반부 번역 (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장 상퇴이유]의 도입부 번역입니다. 

액자구성의 액자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아직 불분명한 구절들이 많은 초고 상태의 번역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본은 1971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온 플레이야드 총서를 따랐습니다. 

번역을 계속 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근데 한국어 잘 읽히나요?) 

(퍼가지는 마세요) 


 







[미완성으로 남은 서문] 




이 책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설 이하일 수도 있지만 분명 소설 이상의 것이다. 이 책은 인생의 흐름, 그 현재 순간, 그 뼈아픈 순간에 아무 것도 섞지 않고 기록한 내 인생의 본질 자체이다. 이 책은 만든 것이 아니라 수확한 것이다. 내 게으름을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폭우를 막고 땅을 일궈 햇볕에 내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내 인생을 이보다 더 잘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연을 바라보고 슬픔에 젖고 우리가 불을 켠 것도 아닌데 가끔씩 광선들이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어 얼음처럼 차가운 사교계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자마자… 












[머리말] 




나는 친구와 함께 9월 한 달을 보내려고 케렝그리멘에 와 있던 참이었다. 당시(1895년)만 해도 케렝그리멘은 콩카르노 만(灣) 해변에 사과나무로 둘러싸인 외딴 농가에 불과했다. 날씨가 좋은 계절에는 파리 사람들과 영국인들이 몰려와서 이곳을 호텔로 이용했다. 하지만 소유주인 뷔자레 영감은 화가들의 권유에 따라 농가의 이름과 모습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이들은 이 장소를 발견하고는 매년 방문해 여름이 끝난 후까지 머물다가 돈이 모자라면 그림으로 대신 숙박비를 지불하면서 다른 손님들보다 먼저 영감과 우정을 맺은 화가들로 그들은 영감이 돈을 번 것은 자기들이 영감에게 가르쳐준 고상한 취향 덕이라고 으스대곤 했다. 

여기서는 날씨가 나빠지기 전까지는 ― 날씨가 나쁘면 난방이 잘 되어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 대리석 기둥으로 치장한 스위스의 고급 호텔에서나 나올법한 훌륭한 식사를 바다를 바라보는 야외 식탁에서 즐길 수 있었다. 문학에 대한 불신으로 매춘부란 문학이 묘사하는 것보다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실상 그와 똑같은 감상적 매춘부를 만났을 때 놀라게 되는 것처럼 살다 보면 종종 놀랍게도 추상적 개념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놀랍게도 꽃들을 사랑하며 꽃들을 시각적 언어로 설명하는 정원사, 농가의 매력을 잘 알고 있으며 속된 취향으로 집을 장식해 그 매력을 망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촌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세탁부가 아들을 잃었다며 보내온 편지에서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갖지 못한 (우리 영혼의 누이가 될 법한) 세심함을 보는 것처럼 화가는 농부나 뱃사람에게서 자기와 똑같은 정신을 갑자기 발견하고는 놀라는 것이다. ꡔ일리아스ꡕ의 송(頌)에서 오늘날의 언어를 알아볼 수 있고 이집트사(史)의 어떤 위기가 오늘날의 사건들과 비슷한 것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러한 특성은 잘 보이지 않아 끊어진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인간의 바탕에 있는 것이어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어느 날 오후 주인과 담소를 나누던 중 나는 우리와 멀지 않은 큰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나와 내 친구들이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로 꼽고 있는 C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끄럽게도 주인의 말을 듣기 전에는 그 사람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내 친구는 낚시하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이 엄청난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어 친구가 돌아오기만을 초조히 기다렸다. 결국 그가 돌아왔고 나는 그 즉시 이 엄청난 발견을 알려주었다.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우리는 편지를 여러 통 썼다가 마음에 안 들어 전부 불태워버렸다. 그런데 식사 시간이 다가와서 결국 마지막에 쓴 편지를 보내기로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그 중 가장 못 쓴 편지여서 전에 쓴 편지들을 태운 것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편지를 다음날 썼다면 더 잘 쓸 수 있었겠지만 우리는 C가 바로 옆에 열렬한 팬 두 명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도 그동안 잘 지낸 것 같기는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알기를 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완전히 무명이었기 때문에 우리 이름을 얘기해봐야 큰 의미가 없을 것이고 귀찮은 사람들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데다 그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 한층 돋보이게 할 요량으로 우리는 C와 잘 아는 사이라고 했던 우리와 매우 친한 공작부인의 이름을 언급했다. 우리는 그럼으로써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곳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는 편지를 하녀에게 갖다 주어 C가 돌아오자마자 전하라고 부탁했다. 

친구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나는 벌써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식당에 가면서 우리는 더욱 초조해졌고 그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이 진정되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우리는 훈장이든 결투장이든 달게 받을 각오를 했다. 이제 우리 편지의 온갖 잘못이 확연히 생각났다. 마침내 그가 들어왔다. 그는 진흙투성이였지만 매우 즐거워 보였으며 꽤 친해 보이는 영국 귀부인 두 명 사이에 쾌활하게 앉았다. 그때 하녀가 편지를 가져다주었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접시에 코를 박고 밥을 먹으면서 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덜덜 떨었다. 마침내 그는 영국 여인들과 함께 식당을 떠났다. 우리는 그가 이런 편지를 하루 종일 받고 있으며 거기에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우리는 극도로 왜소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인간 정신의 여러 능력들 중 자존심만큼 확신을 갖기 힘든 것도 없는 법이니 말이다. 그 누가 경진대회에서 상을 탄 후 자기 자신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겠으며 그 누가 대입시험에서 낙방한 날 자기 비하에 빠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 편지에는 훌륭한 문장들이 있었다. 

마침내 C가 돌아왔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시가를 집으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그가 몸을 돌리자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으러 갔다. 우리는 애초에 하려던 말은 하나도 하지 않고 나중에 생각하면 바보 같았던 얘기만 했다. 그는 문제의 공작부인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공작부인은 C를 다른 작가와 혼동했으며 C는 부인의 집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한 짓만큼 수상쩍은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의혹을 내비치지 않았으며 분명 의혹을 느끼지도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당시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온갖 것에 대한 질문을 해댔다. 특히 우리가 머물던 고장에 대해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가 이 고장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자 우리는 이 고장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싶어졌다. 우리는 그를 재촉하여 장소 몇 군데의 이름을 이끌어냈고 우리는 그 곳들을 산책, 아니 성지순례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그가 어떤 것이 매력적이라고 얘기하면 우리는 그에게서 더 구체적인 형용사를 이끌어내고야 말았다. 이 형용사로 인해 그가 밝힌 취향, 엄청난 위신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취향은 근거를 얻었고 우리는 그의 진솔한 한 마디로 일깨워진 수천 가지 사물에 대한 호감에 더 분명한 무엇인가를 더할 수 있었다. 존경하는 스승 앞에서 젊은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는 그가 자기 책에서 얘기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호텔에 머물던 다른 손님들이 조금씩 떠나가고 두 명의 영국 귀부인도 떠나면서 (그는 캥페르까지 배웅을 나갔다) 우리는 그의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지만 그가 언제나 아주 늦게 다들 식사를 마친 후에야 도착했으므로 함께 먹는 일은 드물었다. 

그에게 자꾸 질문을 던지고 다른 사람, 다른 것에 대해 그에게 질문을 던지다보니 우리는 그가 언제 일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절벽 쪽을 오래 걷곤 했는데 항상 위쪽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랐다. 그리고 아마도 걸으면서 점점 생각에 도취해서인지 (우리는 아래쪽에서 그를 바라보았는데) 걸음이 점점 빨라져 인적이 전혀 없는 등대지기의 작은 집까지 머리를 흔들며 뛰어가다시피 했다. 바로 그곳, 그 진정 숭고한 장소에서 C는 고대의 점복관(占卜官)처럼 바다 위를 날아가는 새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바람소리를 듣고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이런 자연물들은 미래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것 같았다.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거나 해가 다시 나기만 하면 그는 비가 많이 내리던 가을날들, 햇빛이 많던 여름날들, 자기 인생의 모든 시기, 자기 영혼의 어두운 시간들을 떠올릴 수 있었고 그때면 그의 영혼은 다시 밝아져 추억과 시정(詩情)에 도취될 수 있었다. 나와 내 친구는 몸을 숨긴 채로 그가 이런 식으로 추억에 빠져드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그는 잘 이해되지 않는 무엇인가를 보는 것처럼 정면을 바라보곤 했다. 일련의 힘차고도 섬세한 움직임으로, 특히 고개를 들고 굳게 쥔 손으로 그의 신체는 자기 생각의 노력을 모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돌연 그는 즐거운 표정이 되어 글을 쓸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등대지기의 작은 집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비를 피해 그 집에 들어간 이후로 그는 매일 그곳에 들르고 있었다. 그 집을 나올 때면 그는 등대지기에게 약간의 돈을 주었는데 이 고장 기준으로는 너무 큰 액수여서 등대지기는 처음에는 이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C가 남에게 잘 해주려는 마음이 크고, 돈에 관계된 일에 워낙 무지하며, 주변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듣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보니 인심이 후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떨 때는 그가 이 집을 나올 때 등대지기는 이미 바다쪽으로 나갔고 그의 부인도 거위들을 쫓아 나갔을 때도 있었다. 거위들은 개가 짖는 소리에 놀라 바다까지 날아갔다가 수영을 잘 못해 익사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나와 내 친구가 바위 뒤에 숨어 C가 일하는 것을 염탐하던 중 그가 부부의 눈에 안 띄는 것을 확인하고는 거위들을 바다 쪽으로 쫓아버리는 것을 보았다. 등대지기의 마누라가 집에 돌아와 거위들이 없는 것을 알고 울음을 터뜨리자 C는 그제서야 거위들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된 척 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웃고 있었음에 틀림없으며, 이를 보면 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착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망간 거위들을 다 찾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아낙네는 굉장히 마음이 상했다. 그 즈음에 바다가 굉장히 거칠었기에 두 마리는 물에 빠져 죽었고 한 마리는 파도에 밀려 바위에 부딪혀 죽었던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작년에도 T에[첫 페이지의 케렝그리멘 - 옮긴이] 머물렀던 한 부부에게 C의 성격에 대해 나쁜 얘기를 들었다. 부부는 작년에 C와 알게 되서 언제나 식사를 함께 했고 C에게 큰 도움을 준 적도 있었지만 빠리로 돌아오자 C는 이 부부를 방문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C에게 초대장을 두 번 보냈지만 답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C가 여인숙의 하녀와 잤다는 말까지 했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야할 것은 C가 자기는 이러한 형식적인 사교용 편지는 절대 쓰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편지 쓰기는 피뢰침과 같아 정신의 전기(電氣)를 빨아들인다는 것이다. 본디 정신 속에서 전기가 오래 쌓여 그 안에서 폭발될 때에만 진정한 천재적 착상이 솟아날 수 있고 그럴 때만 인간의 말은 천둥처럼 강한 힘으로 울려 퍼지게 되는 것인데 편지 같은 것에 얽매이다 보면 이러한 전기는 축적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 대공부인이 수많은 저명한 사교계 인사를 이끌고 T에서 멀지 않은 케르카라덱의 자기 성관에 들렸을 때 우리는 C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C는 옷을 아주 우아하게 차려입고 성으로 가서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곤 했다. 그런데 성관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등대지기의 집에서 돌아왔을 때만큼 즐거워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또 어느 날 그가 성을 방문하려고 나가자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선생님, 그보다는 등대에 가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잘 아시겠지만 등대에 갔다 돌아오실 때는 훨씬 기분이 좋으시고 적어도 등대에서는 무언가 멋진 글을 쓰시잖아요”. 그는 누가 상처를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그래도 성관 출입을 줄이지 않았으며 단지 며칠 동안 더 신중해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곧 대공부인은 케르카라덱을 떠났다. 

그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전날 밤을 꼬박 바다에서 보낸 것이 아니면 아침에 그는 자기 소유의 견습선원 소년을 데리고 나가 낚시를 갔다. C가 거친 날씨만큼 좋아하는 것도 없었으며 종종 옷을 벗고 배에서 물로 뛰어들어 몇 시간 동안 배를 따라 헤엄을 치곤 했다. 저녁 때는 종종 하녀를 보내 벌써 침대에서 자고 있는 소년을 깨워 일어나게 해 보트를 준비하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달이 떴건 반대로 날씨가 나쁘건 날씨는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는 종종 하룻밤을 꼬박 바다에서 지내곤 했다. 육지에서는 워낙 잠이 얕게 드는 편이어서 걸음 소리에 깨지 않으려고 이 농가의 하인들에게 두꺼운 실내화를 제공하기까지 한 그였지만 바다에서는 잠을 훨씬 잘 잤다. 오후에는 이미 말한 것처럼 등대지기의 집에서 일을 했다. 이 등대지기는 매우 차분한 성격의 사람임에 틀림없는 것이 그의 전임자 두 명은 바다가 분노에 찬 파도로 지붕을 덮어버리며 제 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소리를 내는 겨울 폭풍 동안 미쳐버렸기 때문이다. 밤이 찾아오면 C는 쓰고 있는 글자도 거의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 시각쯤이면 굉장히 광대해진 생각의 속도를 펜으로 쫓아가려는 욕구에 휩싸여 계속 글을 썼다. 등대지기 남자는 소음을 내지 않고 다가와 불량 램프에 불을 켰다. 등대지기가 있으면 글을 쓸 수 없었기에 C는 빨리 가라는 뜻을 전하려고 펜을 내려놓고 이 시각에 등대지기의 붉고 고요한 얼굴을 보게 되어 놀랐다는 듯 반가운 시선을 보냈다. 

떠날 때면 C는 침실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등대지기 부부에게 인사를 했는데 이 침실의 가재도구라고는 마루판에 나무발로 붙어있는 커다란 나침반과 그들이 밥을 먹는 작은 식탁 옆에 켜두는 작은 화로 밖에 없었다. 화로와 촛불은 방안을 전부 밝힐 수 없었지만 빛을 받아 벽 위에 생기는 반사광은 너무나 평화롭고 매일 저녁 하루 일과가 끝난 시각 이 화롯불이 그 너무나 조용한 순간을 비춰주는 삶의 고요함이 묻어 있어 C는 한밤중에 바람을 맞으며 절벽을 내려오다가도 식사중인 등대지기 부부를 보려고 여러 차례 몸을 돌렸으며, 너무 멀어 두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는 이 고요한 직업, 소박한 부부, 이 안락한 골방, 이 달콤한 삶을 그 색깔 속에 삼켜버린 듯한 작은 불빛을 보려 했다. 귀가길에 C는 늦었다는 생각에 걸음을 빨리 했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적어도 두 영국 귀부인이 떠난 후로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나와 내 친구 말고는 식당에 아무도 없는 게 보통이었다. 그는 그 날 한 일에 만족한 듯한 표정이었고 빨리 식사를 했으며 생각으로 가득한 시선으로 전방의 파도를 주시하면서 몇 분 동안 한 마디 말도 없이 있곤 했다. 어떨 때는 코안경을 벗고 이마를 닦은 후 잘 빗어 넘긴 반백의 빨강 머리를 손으로 치켜세우고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 웃곤 했다. 그는 바로 옆에 그 날 낮 동안 쓴 글로 보이는 종이들을 접시로 눌러놓고 있었다. 날씨가 나빠지면서 호텔의 다른 손님들이 하나씩 모두 떠나 투숙객이라고는 우리와 C밖에 남지 않았기에 우리는 우리가 몰랐던 글은 이미 모두 읽어주었으니 이제 오후에 쓴 글을 매일 저녁마다 우리에게 읽어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우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잠시 불분명한 말을 한 후 그는 그러고자 약속했다. 그리고 어느 날 오후에 신작 소설의 도입부 중 그때까지 써놓은 것을 모두 읽어준 후 매일 저녁 그는 식사를 마친 후 옆에 접시로 눌러놓은 종이들을 집어 우리에게 읽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인들이 으레 그렇듯 시작하기 전에 이런 저런 자기 방어적 설명을 워낙 많이 늘어놓았고 읽는 도중에도 듣는 사람의 비판을 막으려고 스스로 자기 비판을 워낙 많이 끼워 넣었기 때문에 우리는 걸핏하면 그의 말을 끊고 읽던 것을 어서 계속하라고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 원고를 읽는 동안 우리는 난방이 아주 잘 되는 식당에 머물러 있었고 ― 날씨가 너무 나빠져서 이제 실외에서는 절대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 종종 있는 일이었는데 낭독이 너무 길어지면 빨리 가서 자고 싶어 안달인 하녀가 문가에 얼굴을 내미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면 C는 하녀를 보내려고 읽던 것을 멈추고 곧 끝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녀가 있으면 글을 읽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가 예전에 좋아했던 몇몇 영국 소설가들의 작품에서 그런 것처럼 종종 성찰형 단락이 튀어나와 플롯이 중단되고 작가가 특정 사안에 관한 의견을 표명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성찰이 스토리의 흥미를 단절시키고 누군가의 인생을 보고 있다는 환상을 깨트린다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이는 매우 짜증나는 대목이 되겠지만 우리로서는 가장 기뻐하며 듣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그의 진짜 생각이 어떤지 너무나 알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이 인물의 캐릭터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자기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들이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우리는 이 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게는 창조력이 전혀 없으며 자기가 직접 겪었던 일만을 글로 쓸 수 있다며 용서를 구했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사건들은 오늘날 워낙 흔해빠진 것이어서 설사 그것이 특이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상상하는 데는 별 대단한 창조력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그 이야기에 어느 정도까지 실제로 관여했었을까? 그는 레베이용 공작과 아는 사이었을까? 마른느 지방에 가면 그의 글에 나오는 개머루로 뒤덮여 물레방아가 돌아가지 않을 지경인 방앗간을 볼 수 있을까? 특히 C의 결점 몇 가지를 갖고 있지만 (특히 감수성과 감성 면에서는) 그보다 장점이 많을 뿐 아니라 몸은 훨씬 허약하고 C와는 달리 어떤 예술에도 재능이 없으며 수많은 불행을 겪은 장Jean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한번 했다가 C에게 매우 건조한 대답을 들은 후로 이런 류의 질문을 감히 그에게 다시 묻지 못했지만 이만큼 관심이 가는 것도 없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푸는데 전 인생을 바치면서 인생을 잘못 사용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인생은 우리가 어느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들 중 가장 알아야할 것이니까, 우리는 작가의 삶과 작품, 현실과 예술 사이에 존재하는 비밀스런 관계, 필수적 변형, 아니, 삶의 외양과 실재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것이니까. 

하지만 인생의 한 순간에 가장 중요해 보이는 것도 그 당시에는 우리 삶이 끝날 때까지 그 중요성이 변치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우리는 11월초에 시작하는 어떤 일로 빠리에서 호출을 받아 C에게 작별인사를 해야만 했다. 그 즈음에 우리는 C와 너무 친해져 있었고 그 역시 매일 저녁 원고를 읽어주기 시작한 이래로 우리 두 사람에게 진정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떠나는 것에 마음이 아픈 것처럼 보였지만 두 영국 여인이 떠날 때처럼 캥페르까지 배웅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12월초에 빠리로 돌아가야 했다. 우리는 그가 빠리에 돌아오는 대로 그를 방문하겠다고 약속했으며 나나 내 친구나 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4년 동안 우리는 단 한번도 그를 방문하지 않았으며 원래 다음해 가을에 다시 가기로 되어 있었던 T에도 가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우리는 매일 저녁 그를 찾아가야겠다고 다짐을 하고는 다음날 아침에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는 그에게 편지를 쓰기는 했지만 그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한번은 T 근처를 지날 일이 있었기에 그를 만나러 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렇게 태도를 일변한 것이 너무 부끄러워 감히 그 앞에 다시 나타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죽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자택에서 발견된 서류 중에 우리가 사본을 소유하고 있던 소설 얘기는 없었기에 (내 친구는 다른 일로 바빴으므로) 나는 그 사본을 출판하기로 결심했다.

주인공의 이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중에 제대로 정리해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이 얘기만 해도 논문 두세개는 쓸 수 있거든요.


수백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 소설에서 특이하게도 주인공(1인칭 서술자)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성도 이름도 안 나오죠.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름이 안 나옵니다. 외할머니(바띨드)를 비롯 다른 친척들은 이름이 나오고요.

그런데 '나'의 이름이 언급되는 곳이 있습니다.


'갇힌 여인'의 두 장면(한 백 페이지 정도 간격)에서 1인칭 서술자가 자기 이름을 밝히죠. 딱 이 두 장면을 빼면 책 전체에 주인공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죠. 엔느님께서 발견하신 구절은 두번째 장면인듯 싶네요. 이 예외를 제외하면 '나', '엄마', '아빠'는 성도 이름도 없는 존재죠.

김창석의 해설에는 프루스트가 '갇힌 여인'의 교정을 다 못 끝내고 죽어서 이 이름이 남은 것이고 프루스트가 교정을 끝냈다면 '마르셀'이라는 이름을 지워버렸을 거라고 설명하는데요.

이건 전혀 사실이 아니랍니다. 이 두 장면은 프루스트가 나중에 일부러 집어넣은 것입니다. 원래 원고에는 없었는데 나중에 교정보던 중에 가필한 거죠.

아무튼 이 때문에 구별하기 위해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는 '프루스트'라고 부르고, 소설의 주인공은 그냥 '서술자' 또는 '마르셀'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저자 프루스트의 생애와 주인공 마르셀의 이야기에 많은 공통점이 있고 또 다른 부분도 많아서 이 작품이 상당부분 자전적이라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데요. 프루스트가 왜 갑자기 익명의 주인공에 자기 이름을 줬는지는 알 수 없지요.

단초가 있다면, 프루스트가 제1권 '스완'이 나왔을 당시에 했던 한 인터뷰에서는

'이 책의 서술자는 내가 아니다'<>

라고 분명히 밝히는데 4권 소돔과 고모라 출간 이후의 인터뷰에서는

'이 책의 주인공이 언제나 나인 것은 아니다(어떨때는 주인공이 나이고 어떨때는 아니다)'<>

라고 애매하게 말했다는 것이죠.

아무튼 많은 연구자를 골치아프게 만드는 문제 중 하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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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건 옛날에 정음사에서 나온 7권짜리 번역본인데요. 갇히여인 71쪽과 149쪽이네요.
(국일미디어판으로는 9권 96쪽이랍니다. 뒤쪽 것은 모르겠네요).

71 쪽. 말하는 기능을 회복하자, 그녀는 '나의' 또는 '나의 소중한'이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 내 세례명의 하나를 붙이곤 하였는데, 만약에 이 책의 작가와 같은 이름을 이야기꾼에게 붙인다면, '나의 마르셀', '나의 소중한 마르셀'이 되었을 것이다.

149쪽. 이 쪽지에는 그녀가 평소에 잘 쓰는 귀여운 표현의 씌어있었다. '극진히 사랑하는 나의 소중한 마르셀....... 심술사나온 마르셀, 고약한 마르셀, 이 몸은 다 당신의 것, 당신의 알베르티느 올림'


인 용한 71쪽의 구절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정확한 의미에서 주인공-서술자의 이름이 마르셀인 것이 아니라 <이 익명의 주인공에게 이 책의 작가(마르셀 프루스트)와 같은 이름을 붙여준다면>이라는 가정법으로 되어있죠. 그러니까 이 구절만 볼 때 주인공의 이름은 뭔지 알 수 없고 작가의 이름이 마르셀이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죠. 149쪽의 구절에서 '마르셀'이라고 쓴 것도 71쪽의 영향 아래에서 가정법으로 붙인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원서의 각주를 보면 프루스트가 자기자신과 주인공이 닮은 동시에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이런 일을 했다고 써있네요. 근 데 성가신 문제가 하나 있죠. 만약 이 책이 3인칭서술 형식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을텐데 책 안에서 '나'라고 하는 1인칭서술자가 계속 주인공인데 갑자기 그 주인공과 다른 '이 책의 작가'가 등장해서 말하게 되니까 두 명의 사람이 하나의 목소리를 사용한다는..


주인공의 가족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주인공 가족에 관한 간단한 정리입니다.
흔히들 그러죠. 알베르틴과 생루는 늙지 않는다, 프루스트는 그들에 대한 애정에서 늙기 전에 죽였다고요. 실제로 이 두 인물의 모델이 된 애인과 친구가 일찍 죽었죠. '되찾은 시간'에 가면 기괴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늙어버린 채로 등장하는데 이 쇠락의 기호를 주인공이 가장 사랑한 이 두 명은 피할 수 있죠. 

반대로 주인공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죽지 않고 이름이 없죠. 프루스트가 부모님의 사후에 본격적으로 작품의 집필에 착수한데 반해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부모님은 죽지 않고 어느순간부터 그냥 등장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이름이 없지만 꽁브레 시절 등장하는 많은 친척들은 이름이 있고 그 관계는 종종 혼란스럽습니다. 정확히 말해 이가 맞지 않는 부분도 꽤 있구요. 번역판으로 읽건 원서로 읽건 혼동되는건 마찬가지죠. 꽁브레에 등장하는 가족들 위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플레이야드판의 인명색인을 참조했고요. 


어머니 : 베니스 체류 이후로는 별로 등장하지 않죠. 

아버지 : '갇힌 여인'서부터 거의 안 나옵니다. 주인공이 알베르틴을 '감금'시키는 대목부터인데요. 사실 아버지가 집에 있는데 그런 일 하기는 좀 뭣하겠죠?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 책에서 딱 한번 지나가면서 언급됩니다.(아마 '소돔과고모라'였던듯). 그러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오면 무조건 외조부,외조모로 생각하면 됩니다. 아래의 친척들도 전부 외가쪽이고 꽁브레집도 외가 소유입니다. 

외할머니(바틸드) : 너무 많이 나와 설명이 필요없을듯. 

셀린느와 플로라 : 외할머니의 두 여동생. 노처녀. 바르트의 '롤랑바르트가 롤랑바르트를 말한다'를 보면 '셀린느와 플로라'라는 제목의 단장이 있죠. 스완에게 감사를 표시하는데 너무 암시적으로 표시하는 바람에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장면에 관한거요. 나중에 외할머니 임종시 이 두 누이는 꽁브레에 머무르고 있고 이후에 둘 중 한 명이 많이 아파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꽁브레에 내려갑니다. 

외할아버지(아메데) : 스완의 부친의 오랜친구. '꽁브레'만 두고 보면 주요 일화로는 의사에게 금주령을 받았고 스완의 사교계생활을 궁금해하지만 대고모, 셀린느,플로라 등에게 제지당하고 블로크를 유태인이라고 놀리는 등이죠. 

아돌프 종조부 : 외할아버지의 동생. 연예인(여배우들)들과 친하고 '장미빛 드레스의 여인'(오데뜨)과 내연의 관계가 있었죠. 모렐의 아버지가 아돌프의 시종이었고요. 꽁브레 집에 자기 거처가 있었죠. 
그런데 질베르트가 주인공보다 어리다는 점을 감안해도 오데뜨-아돌프 일화는 조금 어색합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이들을 보았던 시절에는 오데뜨가 스완과 결혼해 있어야 하니까요. 아돌프의 집에서 오데뜨는 고급창녀로 묘사되는데 스완과 결혼했다면 바람을 피워도 매춘할 필요는 없겠죠. 가능한 설명은 오데뜨가 질베르트를 낳고도 스완과 결혼하지 않은채로 한참 있다가(그 기간 동안에 아돌프를 만나고) 나중에 결혼한다는거죠. 실제로 '꽃피는아가씨들' 앞쪽에 보면 오데뜨가 질베르뜨를 데리고 협박해서 스완과 결혼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불쌍한 질베르트... 

대고모 : '외할아버지'의 사촌입니다. '꽁브레' 앞쪽에서 스완의 사교계 생활을 믿지 않거나 폄하하는 주역입니다. 외할머니를 자주 놀리고요. 꽁브레 집은 대고모의 것 같군요. 

레오니 고모 : 대고모의 딸입니다. 옥타브 삼촌의 미망인이죠. 종종 대고모와 혼동되기도 하죠. 독자 입장에서도 구별이 쉽지 않은데 프루스트가 자신이 혼동한 적도 적지 않구요. 한번은 외할아버지의 질녀가 아니라 외할머니의 질녀라고 말하기도 하니까요. 
그녀의 첫등장은 주인공에게 마들렌 과자를 주는 장면입니다. 프랑스와즈-욀라리와 더불어 3인조 코믹극을 벌이죠. 죽고난 후 유산을 주인공에게 물려주죠. 그녀가 물려준 가구를 주인공은 라셸이 있던 매음굴에 기증하지만요. 


책의 두번째 페이지에서 언급되는 종조부(어린 주인공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던)는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외할머니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꽁브레 이후로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간헐적으로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프루스트가 존재를 잊어버린것 같아요. 

주의해야할 점은 영어나 불어에서 사촌, 삼촌이라는 말이 정확히 한국어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건데요. cousin이라는 단어는 자기와 같은 대의 친척이면 모조리 통칭하죠. 그래서 사촌, 외사촌도 cousin이지만 사촌의 사촌도 cousin이죠. 마찬가지로 엄마의 남자사촌도 oncle이고요. 그러니까 번역판에 등장하는 삼촌, 사촌이라는 명칭은 정확한 촌수를 지칭하는건 아니죠. brother가 형인지 동생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요. 

참, 1권 1부의 '꽁브레' 파트 이후로 주인공은 꽁브레에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다. '사라진 알베르틴'에서 탕송빌(스완네집, 즉 질베르트의 집)에 들리지만 꽁브레에 들린다는 언급은 없죠. 

작품을 끝까지 읽으신 분이라면 다들 느끼셨겠지만 방대한 분량이다보니 이가 안 맞는 부분이 꽤 많아요. 죽은 꼬따르가 다시 등장하기도 하고.. 꽁브레를 보면 게르망뜨쪽 산책길과 스완네쪽 산책길이 워낙 달라서 하나는 집의 정문으로 하나는 뒷문으로 나간다고 하는데 어느 곳을 보면 두 문이 바뀌어 있는 곳도 있고요. 이런 것을 찾는게 재미라고 해야할지 아쉬운 일일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장 상퇴이유와 생트뵈브 비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앞에 올린 글과 상당수 내용이 겹칩니다)

프루스트의 전집을 꾸릴 경우 들어갈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 즐거움과 나날 (Les plaisirs et les jours)
- 장 상퇴이유 (Jean Santeuil)
- 생트뵈브 논박 (Contre Sainte-Beuve)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모작과 잡록 (Pastiches et melanges)
- 시론과 논고 (Essais et Articles) 

여기에 서한집도 넣을 수 있으려나요. (프루스트 서한집은 현재 프랑스에 20여권이 나와있습니다).

전에 제가 생트뵈브에 관해 간단히 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참조하시고요.

옆나라 일본의 경우 아마 이것들 전부가 번역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즐거움과 나날'은 20대 초반 프루스트가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짧은 글들을 묶어서 출판한 책입니다. 국내에는 두 가지 번역본이 있는데 안암문화사의 '즐거움과 나날'가 출판사 기억이 안 나는 민희식 번역의 '사랑의 기쁨'이 있습니다. 전자가 번역은 좋지만 빠진 것이 있고 후자는 반대니까 둘을 함께 보는게 좋겠죠. 물론 둘 다 절판입니다만.

'모작과 잡록', '시론과 논고'는 저자 생전에 묶여 나온 잡문집과 논문집으로 현재 프랑스에서는 포켓판으로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어로 번역해봤자 큰 의미가 없겠어요. '모작과 잡록'은 프루스트가 여러 선배 작가들의 문체를 모방해서 글쓰기 연습을 한 것이라 번역을 할 경우에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죠. '시론과 논고'는 프루스트의 문학 비평들을 모은 것인데 이 역시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가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한국에서는 뭐.....

'장 상퇴이유'는 프루스트가 20대에 착수한 첫 장편소설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모태가 되었다고까지는 못 하겠군요. 많은 테마가 겹치기는 하지만 다른 것도 많고 일단 전체 구성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프루스트는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결코 출판을 원한 것 같지는 않은데 사후에 발견되어서 50년대에 처음으로 출판되었죠. 근데 프루스트 전집이 아닌 단행본으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생트뵈브 논박'은 '잃시찾'의 직접적 모태가 되는 작품입니다. 이 게시판에 관련된 글을 많이 썼으니 참조하시고요. 프루스트가 처음에 '생트뵈브 논박'을 쓰다가 몇년에 걸쳐 조금씩 생각이 바뀌어 결국 '잃시찾'을 쓰게 되죠. 그러다 보니 그대로 가져가 재활용한 부분도 많고요.
문제는 수많은 원고들 중에서 어디까지가 '생트뵈브'이고 어디부터가 '잃시찾'인지 구별하기가 어렵다는거죠. 당연히 '생트뵈브'는 미완성으로 남았는데 미완성이라고 보기도 힘든 것이 계속 '생트뵈브'라는 제목을 유지한채 작품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 '잃시찾'으로 이행했거든요. 

결국 생트뵈브를 잃시찾과 독립적인 독자적 텍스트로 볼 수 있는지 자체가 논란거리가 됩니다. 프랑스에서는 54년과 72년 두 번에 걸쳐 생트뵈브가 출판되었는데 분량이 팍 차이가 납니다. 54년 판본은 생트뵈브를 독립적 텍스트로 보았기에 분량이 두툼한데 72년 판본에서는 나중에 '잃시찾'에서 재활용한 부분들은 모두 삭제하는 바람에 얄팍한 분량이 됩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생트뵈브논박은 독립적 텍스트가 아니라고 보는 입장입니다만)


이런 얘기를 늘어 놓는 이유는 한국에 언제 이 책들이 소개될 수 있을까 안타까와하시는 분들이 계셔서인데요. 
지금 얘기한 것처럼 JS(장 상퇴이유)와 CSB(생트뵈브 논박) 모두 근본적으로 미완성 원고라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잃시찾'도 미완성이지만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이 두 책은 완전히 초고 상태이고 전체 구성도 제대로 없고 문장도 이가 안 맞는 부분이 수두룩해요. 더구나 CSB의 경우에는 기존의 두 판본 모두 문제가 많아 새로운 판본이 나와야한다는 얘기가 많은데 문제는 새로운 판본이 나온다 해도 논란은 사라지지 않을거란거죠.

결국 누군가가 이 책들을 한국어로 번역 출판하려고 하면 당장 어려움이 많죠. 
(1) 둘 다 미완성 원고이다.
(2) JS의 경우는 젊을 때의 작품이라 잃시찾에 비해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
(3) CSB는 소설 형식이 아니라 약간의 소설적 파트와 노골적인 비평문이 뒤섞인 형식이어서 독자가 편하게 읽을만한 책이 못 된다.
(4) CSB는 판본 정립 자체가 문제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책 중 하나를 번역해서 출판했다고 하죠.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가뜩이나 중요성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프루스트이고 더구나 '잃시찾' 일곱 권을 번역판으로라도 완독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백명이나 될지 의심스러운 판에 작가의 다른 작품 두 개가 출판된다고 합시다. 그러면 오히려 세일즈 면에서는 나을듯 싶네요. 왜? 분량만 엄청 길고 읽기 빡빡한 잃시찾 대신 좀 더 만만해 보이는 이 두 권에 덤벼드는 독자가 많을테니까요.

그런데 막상 책은 내용이 별로인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책들을 읽고 프루스트에 흥미가 생겨 '잃시찾'을 제대로 읽는 독자가 늘어나기는 커녕..... 역효과만 나겠죠.


이상... 장 상퇴이유 번역을 시도하다가 때려치면서 머리에 떠오른 핑계와 변명의 말이었습니다.

'잃시찾'의 변모과정 (나) - 알베르틴 소설을 중심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앞글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현재 모습을 다뤘고, 그 전 글에서는 <생트뵈브 비판>을 중심으로 그 과거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실현되지 않은 미래, 가능성으로만 남은 미래에 대해 얘기하죠.

나. <사라진 알베르틴>의 문제.


잘 알다시피 프루스트는 <잃어버린..>을 전부 출판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제4권 <소돔과 고모라>까지는 저자 생전에 출판을 했고 5권<갇힌 여인>, 6권<사라진 알베르틴>, 7권<되찾은 시간>은 대충 완성된 상태였기에 저자 사후에 출판되지요.

그래서 현재의 <잃어버린..>을 보면 5, 6 ,7권에는 아귀가 안 맞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죽은 코타르가 다시 등장하는 식으로요. 아무래도 저자가 교정을 보다가 죽었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지요(<갇힌 여인>의 경우 교정까지 거의 완료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더구나 교정을 하면서 덧붙이는 양이 더 많은 프루스트 특유의 글쓰기를 감안한다면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어쨌든 1922년에 이미 프루스트는 건강이 매우 안 좋은 상태였고 죽기 전에 책들을 완전히 출판하고 싶어했지만 N.R.F 출판사(지금의 갈리마르 출판사)쪽의 게으름 때문에 일은 더디게 진행됩니다. 타디에의 전기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출판사에서 보내온 교정쇄(타자본)에는 어이없는 오타가 너무 많아서 불쌍한 프루스트는 오타를 잡느라 엄청난 시간을 허비해야 했지요.

작품이 금방 출판될 것 같지 않고 자기도 오래 살것 같지 않을 것을 예감하자, 프루스트는 가스통 갈리마르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기가 만약 일찍 죽게 되면 자기 공책들을 연결해서 출판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공책들(원고)은 이후 판본 수립의 토대가 됩니다. 이제 저자 사후 출판된 권들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지요.


주지하듯 <소돔과 고모라>의 1부는 ‘샤를뤼스-쥐피앙의 만남’이고 2부는 그 이후의 소돔과 고모라의 내용입니다. 여기에 프루스트는 소돔과 고모라 3부로 알베르틴의 이야기를 구상합니다. 그래서 <갇힌 여인la prisonniere>과 <도망친 여인la fugitive>은 짝을 이루어 각기 소돔과 고모라 3부와 4부, 혹은 3부1편과 3부2편으로 기획됩니다. (직역하면 ‘여자 포로’와 ‘여자 탈옥수’가 되지요). 이 경우 <되찾은 시간>은 소돔과 고모라 5부 또는 4부가 됩니다.

그런데 1921년인가 22년에 인도 시인 타고르의 시집 한권이 갈리마르에서 <도망친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됩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프루스트는 어쩔 수 없이 이 권의 제목을 <사라진 알베르틴>으로 바꾸게 되지요. 대칭구조는 파괴되지만 불가피한 결정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갇힌 여인’-‘사라진 알베르틴(도망친 여인)’-‘되찾은 시간’이 5,6,7권을 이루는 형태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이지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약간 아귀가 안 맞는 곳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추고 있고 각 권은 거의 완성되었다고 봐야합니다. 그래서 1922년 봄에 프루스트가 셀레스트 알바레에게 ‘난 어젯밤에 <끝>이란 단어를 썼어요. 난 이제 죽어도 돼요’라고 말했던 거지요.


프루스트의 정본은 갈리마르의 쁠레이야드 및 폴리오 판본인데 1954년 판본이나 최근에 새로 편집된 1988년 판본이나 이러한 구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54년 판(김창석 번역본이 대본으로 삼은 것)과 88년 판은 서로 약간 다르지만 대체로 비슷하지요. 22년 봄의 버전이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최종판입니다.

(54년판과 88년판의 대표적인 차이라면 ‘되찾은 시간’의 뒤죽박죽한 일화들의 순서를 약간 바꾼 것, ‘되찾은 시간’의 긴 마지막 문장이 상당히 많이 바뀐 것 등이지요. 그리고 질베르트를 통해서 ‘게르망트쪽’과 ‘스완네쪽’이 사실은 서로 통해있다는 것을 알게되는 일화가 54년판에는 ‘되찾은 시간’의 맨앞에 들어 있었는데 88년판에는 ‘사라진 알베르틴’의 맨 끝에 들어 있습니다. 이건 정말 작은 일이 아닙니다. 아무튼 6권과 7권의 원고는 함께 뒤섞여 있어서 어디서 6권이 끝나고 어디서 7권이 시작하는지를 정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미완성 원고이기 때문이죠. 모든 권의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를 인상깊게 만들었던 프루스트의 수법을 고려할 때 현재의 6권 마지막과 7권 시작은 아쉬움이 많습니다)



그런데 죽기 3-4달 전부터(1922년 5월경) 프루스트는 갑자기 이 모든 구도를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자기가 더 오래 살걸로 생각한 모양이지요. 그리고 이 저자의 최종 변경은 현재의 쁠레이야드판에 전혀 반영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요 변경 내용을 보자면 우선, 알베르틴이 투렌느가 아닌 콩브레, 그것도 뷔본느 냇물 가에서 죽는다는거지요. 다시 말해 알베르틴은 뱅퇴이유 양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죽은게 되어서 그녀의 동성애는 완전한 사실로 확인됩니다. 그리고 현재의 ‘사라진 알베르틴’의 1부 대부분이 삭제됩니다. 현재 판본으로 보면 이 파트에는 알베르틴이 죽은 후 그녀의 동성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에메’(발베크의 그랑 호텔의 직원)의 조사가 주요 내용인데 알베르틴이 콩브레에서 죽게되어 그녀의 동성애가 확실해진다면 이런 내용은 불필요하게 되지요.

이런 식으로 ‘사라진 알베르틴’의 내용을 절반 이상 삭제한 후 프루스트는 이 축소된 ‘사라진 알베르틴’을 5권 ‘갇힌 여인’과 합쳐서 한 권으로 출판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5권=갇힌 여인+ 축소된 ‘사라진 알베르틴’>과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 사이에 적어도 두 세권을 더 쓸 작정을 하지요. 다시말해 분량면에서 <잃어버린..>이 지금보다 최소 두권은 더 늘어날 뻔했다는 겁니다.

문제는 프루스트에게 시간이 없었다는 거지요. 심지어 그는 죽기 몇시간 전에 ‘차(茶)종이'에 새로운 권들의 개요를 적어두기까지 하는데, 이 권들은 개요 이외에는 한 글자도 쓰여지지 못하지요.


결국 저자의 최종 의도에 따르면 <잃어버린..>은 중간의 두어권이 빠진, 완전한 미완성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책을 출판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프루스트 사후 편집인들은 저자 사망 몇 달전에 완성된 상태를 토대로 판본을 구축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작품의 모습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프루스트 자신이 이러한 엄청난 수정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1987년에야 알려졌다는 거지요. 프루스트 사후 원고는 저자의 동생 로베르 프루스트 박사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nrf출판사의 편집인들은 오직 로베르의 동의를 얻어서야 원고를 열람할 수 있었고 그것도 대단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로베르는 출판사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채 혼자서 원고를 읽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적 미완성을 발견하지요. 그리고 저자의 동생이라는 권리하에 이 미완성을 은폐하기로 결정합니다.

로베르 프루스트 박사는 1922년 봄의 상태, 즉 전체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상태, 작가가 이 구도를 파괴하려고 작정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22년 여름과 가을에 프루스트가 준비하던 새로운 시도의 흔적은 전부 감춰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출판사측조차도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고요(여러 해가 걸린 당시의 교정-편집 작업에 참여한 인사들 중에는 초현실주의의 수장 앙드레 브르통, 현상학자 가브리엘 마르셀, 유명한 비평가 장 폴랑 등도 끼어있었습니다).


프루스트가 죽기 전에 작품의 구도를 통째로 바꾸려 했었다는 이 충격적 사실은 1987년 로베르 프루스트의 딸인 망트 프루스트 여사의 유물들 속에서 발견된 원고로 인해 드러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새로운 원고조사가 진행되고 그 책임자는 로베르 프루스트의 증손녀인 나탈리 모리악이 됩니다. (나탈리 모리악은 당시에 20대중반이었죠 아마. 현재 이 분은 많은 노인네들을 제치고 프루스트 원고연구 팀의 대장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이 가문이 이 원고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뭐 다른 연구자들은 그냥 따를 수 밖에요.

결국 커다란 스캔들이 터지고 언론에도 많이 보도가 되지만 갈리마르쪽에서는 이 발견을 무시하고 그냥 예전 방침대로 새 쁠레이야드 판본(87-88년)을 찍어냅니다. 한편 나탈리 모리악을 주축으로 한 반대 세력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라세 출판사에서(프루스트가 처음에 <스완>을 그라세에서 냈다가 나중에 nrf-갈리마르로 옮겨갔지요) 완전히 다른 미완성 판본을 출간합니다.


예. 아주 골치아픈 문제지요. 간단히 정리하면 프루스트는 일관성 있는 작품 7권(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판본)을 완성해놓고(교정의 문제는 있지만 어쨌든 99퍼센트는 완성되었다고 봐야죠) 갑자기 제6권인 <사라진 알베르틴>을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다시 쓰고 6권과 7권 사이에 몇권을 덧붙이기로 결심했지만 이것을 부분적으로 밖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출판사는 어느쪽을 택해야할까요?


아무튼 이런 이유에서 흔히들 프루스트의 작품을 ‘완성불가능한’ 작품, 미완성을 운명으로 타고난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가가 4-5년만 더 살았어도 최소 두어권이 더 늘었을 것이고, 만약 20년을 더 살았다면 분량이 지금의 두 배는 되었겠지요. 아쉬워해야할까요 다행으로 여겨야할까요?

'잃시찾'의 변모과정 (가) - 권분할을 중심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앞글에서 <생트뵈브 비판>의 얘기를 했지요? 그럼 이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체제가 변해온 과정을 설명해 볼께요. 



1. 작품의 분할 : 1-2-3-5-7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생트뵈브 비판>은 <잃어버린...>으로 발전이 됩니다. 이제 프루스트는 비평서의 기획은 완전히 포기하고 소설을 쓰기로 하지요. 당시의 소설은 한 권으로 출판될 예정이었습니다. 제목은 여러 가지를 고려하고 있었는데 <마음의 간헐>, <칼에 찔린 비둘기> 등등이었지요. 한편 NRF(지금의 갈리마르) 등 여러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은 프루스트는 그라세 출판사(Grasset)에서 자비 출판을 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 소설은 이미 천쪽을 상회하고 있었기에 출판사쪽에서는 제본 기술의 문제나 판매 등을 고려해서 두 권으로 나눠 내자고 제안합니다. 프루스트는 한 권으로 내고 싶어했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지금 생각하면 다행이지요. 그 덕에 작품이 이렇게 방대해질 수 있었으니). 두 권 구도일 때 총제목은 <마음의 간헐>, 상권은 <잃어버린 시간>, 하권은 <되찾은 시간>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이 경우 발베크 체류도 상권에 포함될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후 양은 계속 늘어만 가고 출판사측의 요구가 덧붙여져서 작품은 세 권으로 예정됩니다. 1913년 드디어 <스완네 집 쪽으로>가 그라세출판사에서 나왔을 때 제2권 <게르망트쪽>과 제3권 <되찾은 시간>이 예고됩니다. 이 3부작의 체제는 곧 포기되지만 구성 면에서 볼 때 가장 완벽한 것입니다. 

사실 현재의 <스완>을 보면 구성이 약간 어색한게 사실입니다(프루스트는 1913년에 처음 나온 그라세 판본을 10여년후 갈리마르에서 다시 내면서 단어 몇 개만 수정했습니다. 그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판본이죠). 현재 1권 <스완>의 3부를 이루고 있는 질베르트와의 샹젤리제 만남과 2권 <꽃피는 소녀들>의 1부인 질베르트와의 본격적 교제 및 이별은 분리되어서는 안되지요. 하지만 너무 두꺼운 책을 만들고 싶지 않아하는 출판사측의 사정 때문에 약간 어색한 분할이 생기고, 이후 프루스트는 현재의 2권 1부에 해당하는 부분의 양을 더 늘입니다. 


그런데 1914년에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실질적으로 몇 년동안 출판계가 완전히 마비됩니다. 징집을 겨우 면제받은 프루스트는 이 시간을 이용해 작품의 양을 계속 늘리지요. 그리고 그라세 출판사의 사장인 베르나르 그라세가 징병되어 전선에 있다는 핑계로 작품의 판권은 그라세에서 NRF 출판사(현재의 갈리마르 출판사)로 넘어갑니다. 사실 프루스트는 처음부터 NRF를 원했지만 앙드레 지드의 거부권 행사로 어쩔 수 없이 그라세 출판사에서 자비출판을 했던거지요. 

전쟁으로 인한 몇 년 간의 시간 동안 프루스트는 작품의 구도를 바꾸고 분량을 늘립니다. 그래서 1918년 <꽃피는 소녀들의 그늘 아래서>가 NRF에서가 출판되었을 당시에는 현재의 구도가 거의 완성된 상태였지요. 알베르틴이라는 인물이 도입된 것도 이 전쟁통입니다. 물론 1909년의 원고에도 알베르틴의 전신인 마리아라는 인물이 나오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알베르틴의 소설’이 만들어진 것은 1차대전중이지요. 

(주 - 5권 '갇힌 여인'과 6권 '사라진 알베르틴'을 합쳐 흔히 '알베르틴 소설(roman d'Albertine)'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작품들의 제목을 통해서 프루스트의 구성방식을 잠깐 지적해야겠군요. 뭐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요 

총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입니다. 1권-6권이 ‘잃어버린 시간’을 구성한다면 7권은 <되찾은 시간>이지요. 총제와 마지막 권의 제목은 이렇게 댓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편 주지하듯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와 3권 <게르망트 쪽>은 대칭 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 산책길, 두 살롱으로 대비되는 부르주아 세계와 귀족 세계의 대비... 뭐 이런거죠.

한편 4권 <소돔과 고모라>(1부,2부)가 실질적으로는 소돔(남성동성애)만 다루고 있다면 <갇힌 여인>(소돔과 고모라 3부), <사라진 알베르틴>(소돔과 고모라 4부)은 고모라(여성동성애)를 다루고 있지요. 결국 4권과 5-6권이 또다시 대칭을 이룹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6권의 원제는 <달아난 여인>으로 5권 <갇힌 여인>과 대칭을 이루도록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6권의 출간 직전 인도 시인 타고르의 시집 '달아난 여인'이 출간되면서 6권의 제목은 <달아난 여인>에서 <사라진 알베르틴>으로 바뀝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프루스트 연구자들은 보통 5권과 6권을 묶어서 <알베르틴의 소설roman d'Albertine>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자체 완결성이 있으니까요. <꽃피는 소녀들> 중의 한 명으로 등장한 알베르틴이 주인공이 된다는 점에서 결국 2권과 5-6권은 다시 연결되지요. 


한편 소제목들을 보면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의 3부는 <고장의 이름 : 이름>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그런데 2권 <꽃피는 소녀들 그늘에>의 2부는 <고장의 이름 : 고장>으로 이와 연결되지요. 이것은 1권에서 방문해 보고 싶은 고장들(발베크, 베니스, 플로렌스, 파르므 등)의 이름을 몽상하던 주인공이 2권에서 실제로 발베크를 방문하는 것이죠. 그런데 혹시 기억하실 지 모르겠지만 주인공은 고장의 이름만을 몽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름(게르망트)도 몽상하지요. 주로 1권의 1부와 3부에 나오는 얘기지만요. 그래서 본래 구도에서는 3권 <게르망트쪽>에 <사람의 이름 : 게르망트 공작부인>이라는 챕터가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3권부터는 소제목들을 넣지 않게 되면서 이러한 구도는 파괴되지요. 


결국 프루스트의 글쓰기 과정을 살펴보면 여기에는 거의 강박적으로 소설의 거시적 구성을 구조화, 조직화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의도는 끊임없이 더 많이 쓰려는 글쓰기의 운동 자체로 인해 계속해서 훼방받고 파괴되지요. 하나의 대칭구도를 설정했다가 분량이 더 늘어나고 구도에 변화가 생기면서 그 구도는 깨지고 또다른 대칭구도를 설정하고.. 하는 식의 쳇바퀴운동(악순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이 거듭된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루스트가 끝까지 고집한 것이 있으니 바로 1권과 마지막 권을 두 축으로 작품을 구성한다는 원칙입니다. 주지하듯 프루스트는 <스완>과 <되찾은 시간>을 먼저 써놓고 중간을 썼지요. 그런데 양쪽 끝이 확정된 대신 그 중간부분은 끊임없이 늘어나서 저자의 죽음 이외에는 정지할 방법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이러한 구성에의 열정은 나중에 보답을 받게 되지요. 60년대에 프루스트가 재평가를 받기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이 작품이 ‘아무렇게나 쓴 회상록이 아니라 복잡하고 철저한 구성을 가진 픽션 작품’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꽤 복잡하니 간단하게 작품의 체제가 변해간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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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 프루스트는 단 한 권을 희망. 제목은 '생트뵈브 비판'이었다가 그 제목은 포기하고 '마음의 간헐'이나 '칼에 찔린 비둘기' 사이에서 고민.


2) 1913년 초. <스완네 집 쪽으로(이하 '스완')> 출판 직전 
- 출판사의 요구로 두 권으로 나누기로 함. 총제 <마음의 간헐>, 상권 <잃어버린 시간> / 하권 <되찾은 시간>


3) 1913년 <스완> 출판 
- 세 권으로 된 체제 예고. 총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확정
1권 스완네 집 쪽으로 / 2권 게르망뜨 쪽 / 3권 되찾은 시간 

4) 1918년 제2권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 
- 다섯 권으로 된 체제 예고. 
1권 스완네 집 쪽으로 / 2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3권 게르망뜨 쪽 / 4권 소돔과 고모라 1부 / 5권 소돔과 고모라 2부 : 되찾은 시간 

5) 실제 출판된 것 
- 일곱 권 체제 (현재 판본) 

6) 죽기 직전 프루스트의 계획 
- '사라진 알베르틴'과 '되찾은 시간'의 중간메 몇 권을 더 써서 9권에서 10권으로 쓰려함. 생각만 있었고 대략적 구도는 있었지만 쓰지 못하고 죽음. (이에 대해서는 얘기가 너무 길어서 다음 글에서 따로 다루겠습니다. 이 글은 제 서재에 올립니다) 




<<<현재 모습>>>> 
(권제목과 소제목에서 상호연관성을 확인해 보세요) 


1권 <스완네 집 쪽으로> 
1부 : 콩브레 / 2부 : 스완의 사랑 / 3부 : 고장의 이름-이름 

2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1부 : 스완 부인의 주위 / 2부 : 고장의 이름-고장 

3권 <게르망뜨 쪽> 

註 : 초판 출간 당시 ‘게르망뜨 쪽’은 두 권으로 나뉘어 출판되었는데 ‘게르망뜨 쪽 2부’와 4권 ‘소돔과 고모라’의 1부(40쪽 정도의 샤를뤼스와 쥐피앙의 만남)는 한 권에 묶여 있었음. 즉 게르망뜨쪽 상권(게르망뜨쪽 1부) + 게르망뜨쪽 하권(게르망뜨쪽 2부+소돔과 고모라 1부). 요즘 프랑스판본이나 한국판본은 이렇게 하지 않고 소돔과 고모라 1부를 그냥 소돔과 고모라에 넣습니다. 프루스트가 왜 이렇게 이상한 권분할을 원했는지는 책을 보신 분은 아실겁니다.

4권 <소돔과 고모라> 
1부(샤를뤼스와 쥐피앙의 만남. 40쪽 정도) / 2부 (2부는 네 개의 챕터로 되어 있음. 400쪽 이상).


5권 <갇힌 여인> 
또는 소돔과 고모라 3부. 또는 소돔과 고모라 3부 1장. 

6권 <사라진 알베르틴느>(달아난 여인) 
또는 소돔과 고모라 4부. 또는 소돔과 고모라 3부 2장. 

7권 <되찾은 시간> 
또는 소돔과 고모라 5부, 또는 소돔과 고모라 4부. 


 


프루스트의 수용에 관해 + 생트뵈브비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지금이야 이론의 여지없이 서구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공인받고 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 내에서 프루스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인색한 편이었죠. 물론 1919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의 제2권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가 공쿠르 상을 수상했고, 30년대 갈리마르 출판사(당시 명칭은 N.R.F.출판사)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항상 프루스트가 올라 있었을 정도로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둔 건 사실이지만요. 

하지만 저자 사후(1922년, 즉 제5권 <갇힌 여인>의 출간 직전) 프루스트에 대한 관심은 급속히 약해지기 시작했고, 2차 대전 종전 후 사르트르가 극복해야할 부르주아 문화의 대표적 작가로 프루스트를 거명하면서 그의 이름은 결정적으로 잊혀지게 됩니다. 20년대 이후로 영미권이나 독일, 일본 등에서는 프루스트가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었음에도 말이에요. 지금 생각하면 좀 어이가 없죠. 

프루스트가 오랫동안 망각된 까닭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요. 






1) 공쿠르 상 로비설. 

공쿠르 상 심사위원 중 프루스트의 친구들과 갈리마르 출판사(<스완네집>은 그라세에서 처음 나왔지만 1차대전중 판권이 갈리마르로 이양되어 2권서부터는 갈리마르에서 계속 나옵니다)의 인사들이 상당수 포진되어 있었고, 결국 상은 탔지만 이 때문에 심사 과정 및 결과에 대해 잡음이 끊이질 않았죠. 

여기서 굉장히 우스운 사건이 벌어지는데요. 최종결선에서 떨어진 작가(저자와 제목은 잊었어요.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작가죠)가 심사결과에 불만을 품고 책 앞에 ‘공쿠르상 수상 작품’이라는 띠지를 달고 서점에 책을 깔은거죠. 그 리본에는 큰 글자로 ‘공쿠르상’이라고 써있고 아래에 작은 글씨로 ‘2등상’이라고 써있었대요. 완전히 한국의 스포츠신문과 똑같은 수법이죠?(상단에 “최진실 애 못 낳는다”....하단에 조그맣게 ‘바빠서’) 

이런 식의 루머가 떠돌면 실제 작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문학계 인사나 독자들에게 부정적인 선입관이 생길 수 밖에 없죠. 대종상에서 모 여배우가 로비를 했다는 말이 나오면 그 배우의 연기력을 폄하하게 되는 것처럼요. 



2) 유태인, 동성애자, 그랑 부르주아, 사교계 인사. 


일단 그가 그랑 부르주아 출신의 사교계 인사였다는 사실은 프루스트 생전에도 그의 문인 경력에 커다란 장애물이었죠. 프루스트는 처음에 ‘스완네집’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내기를 원했지만 앙드레 지드가 퇴짜를 놓았다는 사실은 유명하죠. 지드는 몇십쪽을 읽다가 집어던졌다고 주장하지만 최근에 번역된 <나의 프루스트씨>(조르주 벨몽, 시공사)를 보면 원고의 포장조차 뜯지 않고 반송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사과하기는 했지만 이 전기에 따르면 그조차 억지로 한 것이었던듯 싶고요. 지드는 프루스트에게 보낸 사과 편지에서 ‘당신이 아무개 부인 댁에 드나들던 사교계 인사라고 생각해서 당신 원고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밝히지요. 

여담이지만 <나의 프루스트씨>는 꼭 볼만해요. 프루스트를 옆에서 10년 동안 모신 하녀 셀레스트 알바레의 회상록이거든요. 그녀는 ‘소돔과 고모라’에 동생, 남편과 함께 실명으로 등장하기도 하죠. 물론 셀레스트의 증언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나탈리 모리악 다이어, 즉 프루스트의 동생 로베르 프루스트 박사의 증손녀이지요. (심지어 친할아버지는 프랑수아 모리악입니다). 지금은 꽤 유명한 프루스트 연구자입니다. 나이는 30대 중반. 나중에 기회가 되면 프루스트 원고 문제를 얘기하면서 이 사람 얘기를 다시 하도록 하지요. 

본론으로 돌아가서, 프루스트가 작품 집필을 위해 코르크로 밀봉한 방에 쳐박혀 글만 썼다는 신화가 있는데, 코르크로 방을 막은 것은 그의 병 때문이었고 그렇게 틀어박힌 후에도 매일 저녁 사교계 나들이를 계속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안 유명한 것 같더군요. 아무튼 프루스트 생전에 이미 저자에 관한 말도 안 되는 신화가 유포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백만장자다(틀린 말은 아니죠), 잠을 전혀 자지 않는다,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우스운건 셀레스트도 그가 거의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고 증언한다는거죠. 아마 집에서는 굶고 밤에 사교계에 가서 포식하지 않았을까요?) 등이죠. 

어쨌든 저자 자신의 삶이나 작품의 내용이나 귀족 사교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보니 문단에서는 그에 대한 시선이 고울 수가 없었지요. 사르트르가 그를 부르주아 문화의 대변자로 낙인찍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고요. 

책세상에서 나온 프루스트 전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너무 잘 사는 집 출신이라는 점도 걸렸겠죠. 부모가 죽은 후 유산으로 받은 돈이 현재 화폐가치로 (한화로 환산하면) 현금 50억원이 넘었죠. 프루스트 본인은 그 돈을 갖고도 자기가 가난뱅이라고 생각했지만요. 유산 상속 17년 후에 프루스트가 죽었을 때는 실제로 거의 남은 돈도 없었죠. 일단 프루스트가 식당이나 호텔에서 뿌리는 팁은 '전설적인 수준'이었고 집은 작은 곳에서 살았지만 리츠 호텔등에서 친구들을 불러서 파티를 한다거나 작품 집필 도중 음악이 듣고 싶어서 실내악단을 자기 집으로 불러 나홀로 감상회를 여는 등 낭비가 장난이 아니었죠. 

아무튼 프랑스 문학사에서 대귀족이나 그랑 부르주아 출신 문인이 적지 않았지만 프루스트의 경우에는 특별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늘상 사교계나 드나들고 있었으니 문단에서 좋게 볼 리가 없지요. 아직 젊은 시절 <즐거움과 나날>을 냈을 때 이 책을 두고 악평을 한 기자와 결투를 할 뻔도 했는데 이미 그때부터 프루스트는 문단에서 ‘찍힌’것 같군요. 

출신계급과 사교계출입 이외에도 그가 배척을 받은 또다른 이유가 있죠. 프루스트는 동성애자였고 그의 어머니는 유태인이었다는 거요(베르그송이 프루스트 모친의 사촌과 결혼했다죠. 베르그송과 프루스트는 그래서 아는 사이였고, 서로의 ‘기억’ 이론이 상관 없음을 둘 다 인정했죠. 사람들은 끊임없이 연결시키려 했지만요). 솔레르스 같은 경우는 그의 망각에 대해 이 두 가지 사실을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더군요. 당시의 프랑스 사회에서 반(反)유태주의와 동성애 혐오가 분명히 존재했었으니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죠. 물론 특성상 증명하기도 쉽지 않지만요


3) 자서전인가 소설인가? 



1907년경 아직 <생트뵈브 비판>을 쓰던 무렵 프루스트는 다음과 같이 씁니다. ‘소설을 써야하는가, 철학책을 써야하는가? 나는 소설가인가?’. 
여기서 <생트뵈브 비판(Contre Sainte-Beuve)>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하겠군요. 


(ㄱ) 프루스트와 마르셀 

프루스트가 평생 단 한 권의 책만을 쓰려고 했다는 주장은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하 <잃시찾>으로 표기)가 바로 그 책이고요. 하지만 그 전에도 프루스트는 오랫동안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잃시찾>의 주인공(이하 ‘마르셀’로 표기)과 저자 프루스트를 동일시하는 오류가 많은데, 적어도 글쓰기에 관한한 둘은 아주 다릅니다. 

<잃시찾>의 주인공 마르셀은 항상 작가가 되고 싶어하면서도 평생 거의 글을 쓰지 않지요. 예외는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일단 어린 시절 꽁브레에서 마르탱빌르의 종탑에서 받은 인상을 마차에서 글로 옮긴 것이 첫 글이고요. 작품 후반에 <피가로>지에 기고한 글의 얘기가 나오고요. 그 외에 지나가면서 언급되는 것으로 ‘스완과 오데뜨의 사랑에 관한 소설 비슷한 글’을 쓰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번역을 했다는 말(프루스트의 러스킨 번역에 대한 암시)이 나오죠. 베르고트가 그의 글을 보고 ‘문장이 완벽하다’는 칭찬을 했다는 말이 <되찾은 시간>에 나오기도 하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본격적으로 창작에 몰두하는 일은 없습니다. 작품 끝에 가서 겨우 결심을 할 뿐이죠. 그래서 마르셀은 자신의 의지박약을 항상 한탄하고 그것은 어머니와 할머니에게도 큰 고통을 안겨주죠. 

반대로 프루스트의 삶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어도 굉장히 정력적이고 부지런한 작가의 인생이었습니다. 우선 20대 초반에 <즐거움과 나날들>을 내지요(제가 예전에 올린 게시물에 두 종류의 국역본에 대한 짧막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아나톨 프랑스이 서문을 써주었고요. 여담이지만 아나톨 프랑스가 베르고트의 모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사람들이 아나톨 프랑스에게 왜 프루스트의 <잃시찾>을 읽지 않냐고 묻자 “인생은 너무 짧고 프루스트는 너무 길다(la vie est trop courte, et Proust est trop long)”라는 명언을 남겼죠. 물론 <잃시찾>의 분량이 너무 길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프루스트가 <잃시찾> 이전에 공식적으로 발표한 글은 <즐거움과 나날들> 외에 두 권의 러스킨 번역과 피가로 지에 실린 몇 개의 평문 등이 있습니다. 자세한 점은 책세상에서 나온 타디에의 전기를 참조하시고요. 러스킨 번역은 본문보다 역주와 해설이 더 긴 연구서에 가까운 형태였다고 하는군요. 그 외에 젊은 시절에 <장 상퇴이유>라는 제목으로 적지 않은 분량의 소설을 시도했고, 무엇보다 <생트뵈브 비판>이 있습니다. 



(ㄴ) 생트뵈브와 전기주의 

<생트뵈브 비판>을 보죠. 생트뵈브는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문학 비평가(이고 안 유명한 시인)입니다. 그는 실증주의에 입각해 작가의 삶을 연구한 후 그를 토대로 작품을 해석하는 전기주의 비평의 창시자이지요. 19세기 말 이후로 소르본 대학의 문학 연구는 지금까지도 이런 방향을 따르고 있습니다. 작가가 살던 당시의 사회상, 작가 개인의 전기, 사상사 등이 소르본의 주요 연구과제지요. 프루스트가 자기 책의 제목을 <생트뵈브에 반대하여>라고 달은 것은 이러한 전기주의 비평을 비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기주의라고 해서 사실 그렇게 거창한 얘기는 아니구요. 한 마디로 '서정주는 친일파인데 그의 작품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문체가 힘차면 작가도 강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인가?' 등의 문제에 관한 것이죠. 

어쨌든 <생트뵈브 비판>에서 프루스트는 피상적 자아(사회적 자아)와 심층적 자아(창작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엄격히 구별하면서 작가의 삶에서 작품의 의미를 찾으려는 생트뵈브의 방법론을 격렬히 비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잃시찾>에서도 중요한 미학적 테마가 되지요. 

작품에 등장하는 위대한 예술가들(엘스티르, 베르고트, 뱅퇴이유 등)은 실제로 만났을 때는 하나 같이 예술적 재능을 전혀 감지할 수 없는 평범하고 우둔한 사람으로 보이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는 예술 창작에 관한 일말의 도움도 얻을 수가 없잖아요. 무엇보다 이 작품의 중심 줄거리 자체가 한평생을 사교계 출입과 수많은 연애로 낭비하던 주인공이 소설가로 거듭난다는 내용이고요. 

더우기 이러한 구도가 저자의 실제 삶과 완벽하게 겹치면서 프루스트는 작품 자체에 있어서나 자신의 인생 자체에 있어서나 텍스트가 작가의 생애에서 완벽히 분리되는 모범적인 예가 되지요(사교계 속물도 거장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미 얘기한 것처럼 프루스트 자신이 워낙 자기의 개인사 때문에 작가로서 고난을 많이 겪었으니 작가의 삶과 작품을 분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었겠지요. 




(ㄷ) <생트뵈브 비판> 


<생트뵈브 비판>은 미완의 원고입니다. 여기에는 게르망트 쪽으로의 산책 등 소설적 파트와 보들레르론, 발자크론 등의 문학 비평, 프루스트와 어머니 사이의 대화 같은 자전적 파트 등 다양한 장르의 단장이 혼재되어 있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생트뵈브 비판>이 <잃시찾>과 다른 독립된 작품이 아니라는거죠. 

프루스트가 <생트뵈브 비판>을 시작한 것은 1905년경이고 <잃시찾>의 첫 권인 <스완네 집 쪽으로>(이하 <스완>)이 출판된 것은 1913년이지요. 프루스트는 처음 <생트뵈브 비판>을 시작할 때 이것을 순수한 비평서로 만들것인지 소설적 파트와 비평적 파트가 뒤섞인 책으로 만들지 고민합니다(이런 고민은 편지를 통해 확인되지요). 그러다가 이것 저것 뒤섞인 어정쩡한 상태로 글을 쓰기 시작하고 그런 식의 작업이 몇 년 동안 계속됩니다. 그래서 이미 여기에는 게르망트라는 이름도 나오지요. 그래서 프루스트는 1907년경 ‘소설을 써야하는가, 철학책을 써야하는가? 나는 소설가인가?’라는 질문을 원고 위에 적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작품은 1인칭으로 쓰기로 결정하고 (그게 언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1907년 이후인건 확실합니다) 그 때부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스완>의 모습이 갖춰집니다. 문제는 현재의 <스완>이 거의 완성된 시점에서도 프루스트는 여전히 이 책을 <생트뵈브 비판>이라고 불렀다는 거죠. 그러다 책을 출판할 시점이 가까와져서야 겨우 <칼맞은 비둘기>, <마음의 간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의 이름 사이에서 고민하다 최종적으로 <잃시찾>으로 낙찰되지요. 

따라서 <생트뵈브 비판>은 <잃시찾>과 구별되는 독립된 텍스트가 아닙니다. 전자를 쓰다가 천천히 조금씩 후자로 이행한 것이죠. 현재 책으로 나와있는 <생트뵈브 비판>은 1910년 이전의 원고들 중 <잃시찾>에 담기지 않은 것을 위주로 편집한 것이고요. 




(ㄹ) 소설인가, 자서전인가? 


<생트뵈브 비판>의 경우 비평서인가 소설책인가의 문제가 제기되었다면 <잃시찾>의 경우 주요 문제는 이것이 소설인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자서전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잃시찾> 역시 비평서인가 소설인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는 합니다. 에세이(한국적 의미의 수필이 아니라 진지한 사변적 글) 형식의 심리 분석, 언어 분석, 외교 분석, 전술 분석 등이 작품 속에 워낙 많잖아요. 

하지만 <잃시찾>의 진짜 문제는 이것이 픽션인가 논픽션(자서전)인가의 문제이죠. 스완이나 게르망트 집안 등 허구적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므로 진짜 자서전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워낙 작가 프루스트와 주인공 마르셀의 인생에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작품이 출간되고도 오랫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프루스트가 자기 인생을 약간만 픽션화해서 바꾼 것이라 생각하고 있죠. 

그런데 소설작품이 ‘자전적’이라는 것은 비평적 평가에 있어 상당히 불리한 요소가 됩니다. 더구나 <잃시찾>은 도저히 구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생각나는 대로 쓴 글처럼 보이기 때문에 문제는 워낙 심각하죠. 그래서 오랫동안 프루스트는 아름다운 문체와 훌륭한 심리분석이 돋보이는 회상록 작가라는 식으로 치부되었고, 이것이야말로 프루스트가 오랫동안 폄하된 주요 원인이지요. 

특히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의 1부인 <꽁브레>의 경우 처음 읽을 때 도저히 스토리라인을 간파할 수 없을만큼 산만하고 무질서해 보이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제1권의 1부를 돌파하지 못하고 책을 놓게 되지요. 실제로 1913년 <스완>이 출판된 후로 구성의 부재를 둔 비난이 끊이질 않았고요. 

여기에 제가 얼마전에 답글을 달았던 것처럼 주인공의 이름 문제가 애매모호하게 얽히면서 자서전이라는 의혹은 더욱 증폭되지요. 프루스트 본인은 자기 작품이 엄격한 구성을 지니고 있고 자서전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잘 먹히질 않았죠. 




4) 미완성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미완성 작품입니다. 
- 1권에서 4권은 저자 생전시에 출간되었으니 큰 문제가 없고요. (1권은 재판을 찍을때 단어 몇 개 고쳤습니다).
- 5권 '갇힌 여인'은 교정이 95퍼센트 이상 끝난 상태였습니다. 이 역시 거의 완성본으로 봐도 무리가 없죠.
- 6권 '사라진 알베르틴'은 한창 교정을 보던 중 프루스트가 죽었습니다. 교정을 보면서 엄청나게 작품을 뜯어고치는 프루스트의 집필습관을 고려하면 미완성으로 봐야죠. 그 외에도 이 6권에는 정말 많은 문제가 있는데 그 얘기는 따로 하겠습니다.
- 7권 '되찾은 시간'은 교정은 커녕 1차 집필도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아... 내용적으로는 완결성이 있어요. 하지만 프루스트의 공책이 워낙 지저분하다보니 7권을 가득 메우고 있는 철학, 문학적 성찰과 플롯의 배열순서가 확실치 않죠. 그래서 7권은 판본마다 조금씩 일화의 순서가 다릅니다. 

 물론 프루스트는 죽기 1-2년 전에 '내가 죽으면 내 공책들을 연결해서 내세요. 대충 완성된 상태입니다'라고 출판사에 얘기했죠. 따라서 완전한 미완성은 아니지만 (잃시찾을 다 읽은 독자 중에도 이게 이런 미완성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 못챈 독자들이 대부분일겁니다) 저자가 더 오래 살았다면 많이 내용이 바뀌었을 거라는 것이죠.


 문제는 6권, 7권이 (특히 7권이) 초고 상태이다 보니 자체 완결성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잃시찾의 일곱 권은 독립된 작품들이 아닙니다. 삼국지가 열두권으로 출판되었다고 해서 그게 열두개의 소설이 아닌 것처럼요. 하지만 그래도 프루스트는 출간되는 권마다 그 권 내부에서 내적인 구성과 통일성을 분명히 만들어놓았죠. 그런데 6,7권은 그런 면에서 약간 모자랍니다. 

더 큰 문제는 6,7권은 교정을 못 마쳐서 비문도 꽤 있고 문장도 안 좋고 이가 안 맞는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6권에서 죽은 인물이 7권에 등장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이니까요.

어느 시점 이후 프루스트의 팬이 되어버린 앙드레 지드는 이 마지막 권들의 '미완성'을 개탄하면서 아쉬워하죠. 다른 이유도 중요하지만 특히 프루스트가 프랑스에서 30,40년대에 망각된 가장 큰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작가의 때이른 죽음으로 엄청난 걸작이 될 수 있었던 작품이 용두사미가 되었다는 인식이 퍼진 것이죠.




5) 프루스트의 복권 그리고 구조주의. 


여기에 대해서는 짧게 쓰겠습니다. (솔직히 좀 힘드네요) 

이렇듯 여러 이유로 <잃시찾>은 오랫동안 망각되었지만 1960년대 들어 프루스트의 위상은 급속히 달라집니다. 이전에도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로 전기 연구나 프루스트 친구들의 회상록 위주였고(평생 프루스트랑 두어번 만난 사람이 '나와 프루스트'하는 식으로 책쓰곤 했죠.ㅋㅋ) 프루스트가 본격적으로 부활한 것은 근본적으로 신비평 그룹의 활동 덕이었죠. 

솔레르스의 회고에 따르면 실존주의 그룹에게도 행동주의 그룹에게도 초현실주의 그룹에게도 푸대접을 받고 있던 프루스트를 구해낸 것은 롤랑 바르트였고(바르트는 프루스트 책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살았다더군요), 이후 20여년간 중요한 연구가 속속 나오면서 프루스트는 새로운 비평 이론이 검증받기 위해 반드시 한번은 도전해 보아야할 시금석이 되죠. 

이러한 화려한 비평적 복권은 물론 프루스트 작품 자체의 풍요성에 기인하는 일이겠지만 당시 신비평이 주목하던 두 가지 중요한 이론적 테마가 <잃시찾>에서 급진적으로 전개되어 있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지요.. 

첫번째는 전기주의 비평의 문제인데 이는 당시 프랑스 문학계의 이념 투쟁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60년대 들어 새로이 대두한 신비평 집단은 소르본으로 대변되는 전통적 문학 연구 방법론과 불가피하게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당시 소르본의 문학 비평은 작가의 생애와 사회적 배경에 대한 검토에 치중하는 랑송류의 실증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데 반해, 신비평은 푸코와 바르트가 제시한 ‘저자의 죽음’이라는 테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컨텍스트에서 분리된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재성을 모토로 작품 자체에 대한 분석을 강조했지요. 

그런데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생트뵈브 비판>은 반(反)전기주의를 노골적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최초의 신비평 선언문”이 되죠. 따라서 “프루스트에게 관심을 집중한 것이야말로 신비평의 최대 업적 중 하나”라고 할만큼 프루스트의 복권이 신비평 진영의 연구에 빚지은 바 크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프루스트라는 존재가 결과적으로 신비평의 문학관에 커다란 이론적 원군이 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죠. 다시 말해 프루스트를 되찾는 것은 신비평에게는 자신들의 선구자, 후원자를 창출하는 일이었던 것이고요. 



그런데 신비평이 프루스트에게서 주목한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지요. 프루스트 작품이 출간된 이후로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현대 문학의 중요한 특성으로 알려진 ‘파편성’의 개념이 바로 그것이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프루스트의 매우 독특한 통일성 이론이 그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인데, 이 문제는 앞에서 말한 구성의 부재와도 관련됩니다. 

시간이 나면 따로 긴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몇 줄로 요약하면 오랫동안 프루스트의 작품에 ‘구성의 부재’라는 딱지가 붙어있었다면 60년대 들어 <잃시찾>이 매우 정교한 건축적 구성을 갖고 있음을 입증하는 연구가 속속 나왔고, 이후 들뢰즈, 바르뜨, 주네뜨 등에 의해 프루스트가 ‘파편성’의 작가, ‘안티 로고스’의 화신으로 추앙되었던 것이죠. 


앞에서 프루스트 사후 출간된 세 권이 구성이 안 좋다는 비판에 시달렸다고 언급했는데요. 70년대 이후 연구자들은 원고 검토와 꼼꼼한 서사학적 연구를 통해 (미완성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특징이 저자의 죽음으로 인한 애도할만한 결함이 아니라 프루스트의 의식적 선택이었다는 것을 증명해냅니다.

작품 초반에 엄격한 건축적 구조를 설계하고 그에 따라 작품을 쓰다가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그런 체계를 파괴하는 해체주의적 작업을 시도했다는 것이죠. 


가장 명확한 예가 주인공이 이름입니다. 이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할만큼 긴 얘기인데요. 간단히 설명하죠.

작품 내내 주인공/서술자의 이름은 절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5권 '갇힌 여인'에서 두번 조건법으로 주인공의 이름이 '마르셀'이라고 주어집니다. 초기 연구자들은 이건 프루스트의 실수다, 프루스트가 교정을 제대로 보고 죽었으면 이걸 지웠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죠(김창석도 역자후기에서 그렇게 설명합니다). 그런데 원고를 뒤져보니 완성된 타자본 위에 프루스트가 직접 이 두 구절을 삽입한 것이 드러납니다. 이런 예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작품 후반부에 이르러 작품은 엄격한 구조의 하중을 못 이겨 무너지면서 해체의 징후를 내비치고 있는데 원고 대조 결과 이들 중 대부분이 실수가 아닌 '의식적 가필'이었던 것이죠. 

빠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수백년 동안 짓다보니 건축 도중에 건축양식의 유행이 바뀌어 세 가지 양식이 공존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프루스트의 작품도 그런 것이죠. 작품 속에는 엄격한 구성을 지키려는 건축가-이론가 프루스트와 막 나가는 파편적 글쓰기를 지향하는 소설가 프루스트 사이의 갈등이 나타나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프루스트는 확고한 거장의 지위를 얻게된 것이죠^^

김창석의 국역본(정음사/국일미디어) 번역 촌평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 텍스트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김창석 번역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밖에 없다. 제1권 '스완네 집 쪽으로'는 여러 번역판본이 존재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체의 번역은 김창석씨의 번역밖에 없다. (김창석씨의 번역은 예전의 정음사본이나 현재 판본인 국일미디어본이나 큰 차이가 없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1954년도에 나온 플레이야드 판본을 대본으로 삼아 번역했다는 것이다. 이 판본은 80년대 초반까지는 가장 권위 있는 판본이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프랑스에서는 54년 이후에 발견된 원고들을 토대로 1988년에 상당부분이 수정되어 판본 쇄신이 이루어졌지만 우리나라의 독자들은 아직까지 <불충분한> 텍스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사실 새로 나온 판을 번역한다 해도 골치아픈 것은 마찬가지이다. 소르본의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편집한 이 새 판본이 그래도 공신력이 있는게 사실이지만 이 판본의 편집 원칙에 대해서도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54년 판 플레이야드와 88년 판 플레이야드의 차이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되찾은 시간>의 마지막 문장(상당히 길다)이 대폭적으로 수정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두 산책길이 사실은 통해 있다는 사실을 질베르뜨가 주인공에게 알려주는 장면이 54년 판에는 <되찾은 시간>의 맨 앞에 있었는데 88년 판에는 <사라진 알베르띤>의 끝쪽에 달려 있다. 정확히 말하면 30여쪽이 앞으로 밀렸다(6권과 7권의 권분할 지점이 달라진 것이다). 셋째, <되찾은 시간>에 나오는 서술자의 성찰들과 일화들의 순서가 상당히 변경되었다. 사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두 번째 것을 제외하면 그렇게 눈에 띄는 것이 아니므로 크게 신경쓸 필요는 없다. (88년 판의 진정한 면모는 책 뒤쪽에 엄청난 분량의 <원고> 및 <이본>을 실었다는 것이고 2차 대전 이후에 이루어진 방대한 연구 성과로 인해 여러 오류들을 바로잡고 보다 상세한 각주를 달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판본 자체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여기서 세 번째 변경에 대해 잠시 설명하자면, <되찾은 시간>의 경우 완전한 결정본이 있을 수 없는 형편이다. 이 마지막 권에는 줄거리보다 서술자의 이론적 성찰이 더 많은데, 프루스트가 이 성찰들을 따로 따로 집필했고 그것들을 연결한 순서가 분명치 않은 곳들이 꽤 있어서 (프루스트의 집필공책이나 타자본을 사진으로라도 본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편집자가 읽으면서 문맥에 따라서 순서를 정해야 하므로 일정 부분의 주관성이 개입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외에도 아주 중요한 판본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는 여기서 논할 계제가 아니니 생략하도록 하겠다.

 
프루스트 원고 상태를 보여주는 사진 하나.
 

프루스트는 공책에 가필과 수정을 끊임없이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늘상 공책의 여백이 부족해서 이런 식으로 다른 종이에 써서 풀로 붙이곤 했다. 이걸 휘지(paperole)라고 하는데 (휴지의 사투리) 이 중 최강인 것은 길이가 10미터를 넘는 것도 있다.





나. 한국어 번역

김창석의 번역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은데 내 견해로는 그래도 읽을만은 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 번역판으로 프루스트를 처음 읽었으며 이후 원서와 씨름하면서 종종 대조를 해보았는데, 특별한 오역이 그렇게 많다고 할 수는 없고(당연히 오역이 있기는 있다. 하지만 이삼천 페이지의 분량을 감안할 때 이 정도는 용서해야 한다). 정작 비판의 초점이 되는 <문체>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프루스트의 문장이 프랑스의 다른 작가들의 글에 비해 읽고 해독하기에 특별히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한국어로 번역하기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번역본이 김창석의 글이지 프루스트의 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자가 문인으로서 자기자신의 문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는데, 이런 점이 이 책의 경우만큼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없을 듯 싶다. 요컨대 우리말이 너무 술술 풀려서 <이거 번역서 맞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지나치게 한국어로 바꾸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나는 고등학교 시절 이 번역판을 읽으면서 모르는 국어 단어가 너무 많아서 국어사전을 옆에 끼고 노트정리를 해가면서 읽어야 했다.


사실 김창석의 번역을 욕하기는 쉽다. 20-30줄은 기본으로 넘는, 살인적으로 긴 불어문장을 동일한 길이의 한국문장으로 옮겼다는 것을 제외하면(이것 자체로도 대단한 일이다. 불어 자체가 관계대명사와 삽입절이 굉장히 발달한 반면에 한국어는 통사 구조상 30줄 넘는 문장을 쓰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도대체 프루스트 문체의 맛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번역에 대해 긍정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직 이만한 번역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번역판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번역한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으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므로 앞으로도 당분간 우리는 김창석의 번역을 읽어야 할 듯 싶다. 이 책을 현재의 김창석 번역보다 더 좋은 수준으로 번역하면서 현재의 연구 성과를 반영해서 제대로 각주와 해설을 달 경우 전공자라도 최소 7-8년은 걸릴 작업이다.


(재번역을 시도하는 분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 얘기를 들은지가 여러 해전인데 아직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물 건너간 듯 싶다). 단, 제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의 경우 다양한 번역이 존재하므로 선택의 여지는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민희식의 번역본은 읽지 말기를 권한다).

더구나 프루스트 문장의 맛은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번역해도 전혀 느낄 수 없을만큼 불어에 특유한 것이고("프루스트가 불어를 만난게 행운이 아니라 프루스트를 만난게 불어로서 엄청난 행운”이다) 그래서 이 프루스트 문체의 결이라는 것은 한국어 통사구조상 도저히 번역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이 부분을 포기하고 나면 김창석의 번역은 대체로 괜찮은데 우선 프랑스인들이 읽기에도 숨이 차는 프루스트의 긴 문장을 우리말로 그냥 옮기는 것도 쉽지는 않은데 (원문의 문장의 길이를 대체로 유지하면서) 이토록 유려한 우리말을 만들어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젊은 외국문학 전공자들이 젖어있는 번역투와 비교하면 더욱더 놀랍다. 
 

김창석 번역의 결정적 약점이라면 이것이 일제시대 때 수학한 사람의 손에 의해 나온 책이라는 것이다. 김창석은 이 번역을 60년대에 시작했고 이후로도 재판을 낼 때마다 계속해서 손을 보았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문체의 의고체는 어쩔 수가 없다. 지금은 쓰지 않는 표현들('정말로'라는 의미에서 '짜장'을 쓰는 것 등)이 너무 많아서 21세기의 현대 독자에게 이 작품은 1920년대 프랑스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제시대 한국 소설 같은 인상이 더 강하게 드는 것이다. 
 

하지만 번역판인 이상 문체 부분은 접어두고 읽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정 욕심이 나면 불어를 공부해서 읽으면 되지만 사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더구나 프루스트 읽기가. 그러니 만족하도록 하자. 

혹시 우리말 번역본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영역본을 읽으려고 덤비는 용감한 독자가 있다면 말리고 싶다. Remembrance of Things Past라고 제목부터 바꿔 달은 이 영역본은 프루스트 자신도 화를 냈을 뿐 아니라 끊임없는 비난을 받아 왔다. 90년대에 다시 나온 영역판(제목을 제대로 옮긴 In Search of Lost Time라는)은 이것보다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반대로 일역본은 상당히 좋다는 평판이다. 적어도 프루스트 연구에 있어서 일본은 미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을 보면 '삼촌'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적수와 누가 미국 최고의 프루스트 전문가인가를 두고 다투는 내용이 있는데 뭐 심각하게 볼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정말 웃기지도 않더라. (더구나 두 명다 게이로 설정이 되어 있다. 기가 막혀서...). 프루스트 서한집을 출간하는 Kolb를 제외하고 미국쪽에서 나온 글 중 쓸만한걸 본 기억이 없다. 반면에 일본 애들은 존중받는 연구가 적지 않다.




다. 프루스트의 다른 작품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외에 프루스트의 책으로는 <즐거움과 나날들>, <장 상퇴이유>, <생트뵈브에 반대해서>, <에세이와 논문들>, <모작과 잡록> 등이 있다. 물론 몇 권의 러스킨 번역도 잊을 수 없다.

<즐거움과 나날들>은 프루스트가 20대 초반에 자비출판으로 내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거의 대부분을 스스로 사들여 친구들에게 돌렸다는 책이다. 몇 편의 몽상적 수필과 단편소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학적 가치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후<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가지 강박적 주제들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사랑스러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30대에 들어 부모가 연이어 사망할 때까지 프루스트는 <공식적으로> 어떠한 창작도 하지 않았다. 물론 여러 해를 바쳐 매달린 러스킨 번역이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는 사교계 인사의 생활에 충실할 뿐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과 프루스트 자신에 대한 동일시가 나온 것이다. 평생을 사교계와 연애에 빠져 놀다가 어느날 갑자기 계시를 받아서 어마어마하게 긴 걸작을 집필했다는 신화 말이다!

하지만 프루스트 본인의 경우 이 신화는 완전 허구이다. 최근 들어서는 프루스트가 이 시기에도 엄청난 양의 습작에 몰두했다는 것이 공인된 견해이다. 20대의 10년 동안 프루스트가 집필한 원고는 (딱히 책으로 묶을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분량만 보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버금갈 정도이다.

그 증거물이 바로 <장 상퇴이유>인데, 이 미완성 소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주요 일화의 상당수를 담고 있다.
 

어쨌든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잃고난 후 프루스트는 잠시 요양원에 칩거했다가(작품에서 주인공이 요양원에서 10년 이상을 보낸 것과 달리 프루스트는 불과 수 개월만 머물렀다) 곧 자신의 <책>의 집필에 착수한다. 최초에 이것은 <생트뵈브에 반대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19세기의 문학평론가 생트뵈브를 비판하는 기획을 지닌 비평서로서 네르발, 발자크, 보들레르 등에 대한 평론을 주축으로 여러 소설적 일화들이 섞여 있다. 여기서 소설적 부분이 점점 확대되면서 바야흐로 <생트뵈브에 반대하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변모하게 된다.


결국 <생트뵈브에 반대하여>는 독립된 작품으로 출간되어서는 안되는 원고뭉치일 뿐이다. 원고 연구에 따르면 <생트뵈브...>에서 <잃어버린...>으로 옮겨가는 이행은 서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경계를 분명히 가를 수 없다. 1910년, 그러니까 1권 <스완네 집 쪽으로>를 거의 완성한 시기에도 프루스트는 여전히 이 책을 <생트뵈브에 반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부르고 있었으므로 이것이 <잃어버린...>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장 상퇴이유> 역시 <잃어버린...>의 모체인 습작으로 간주할 수 있으므로, “프루스트는 단 한 권의 책만을 썼다”는 말은 괜한 미사여구가 아니다.

 
이외에 논문 모음집(<에세이와 논문들>), 패스티쉬 모음집(<모작과 잡록>) 등이 있는데, 특히 프루스트의 “모작”들은 그의 문학적 역정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프루스트는 발자크, 플로베르 등 여러 작가의 문체를 모방하여 여러 편의 글을 써보았는데 (예컨대 ‘르므완느 사건’이라는 하나의 일화를 여러 작가의 문체로 다시 쓰기) 이것은 선배 작가들의 문체를 분석하는 기회인 동시에 자신의 문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되찾은 시간>을 보면 주인공이 공쿠르 형제의 회상록 중 출판되지 않은 원고를 읽는 장면이 나오는데 작품 속에 그대로 인용된 이 원고는 프루스트가 공쿠르 형제의 문체를 모방해 쓴 패스티쉬이다.

 
이 중 <즐거움과 나날들>은 안암문화사에서 91년에 번역이 나왔으며, 동일한 책이 <사랑의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정암출판사(1989)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후자의 경우 한국 불문학 사상 가장 악명 높은 번역자인 민희식의 이름이 붙어있지만 전자보다 구하기도 쉽고 전자에 빠져있는 몇 가지 글들을 온전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추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책의 비쥬얼한 측면, 인쇄-조판, 번역 등은 전자가 백 배 낫다).
 
<장 상퇴이유>와 <생트뵈브에 반대해서>는 아직 번역이 없다. 일본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만도 세 종류의 번역본이 있고 프루스트 전집 자체가 나와 있으며 심지어 프루스트의 서한집마저 상당히 번역되어 나왔다지만(대체 이런 짓을 왜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인들의 프루스트에 대한 열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우리 나라에서 프루스트의 지명도는 이미 세계적인 프루스트 연구자(특히 조 요시다)를 여럿 배출한 일본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니 거기까지 바랄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프루스트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이 책들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한국에 언제 번역판이 나올지 안타깝기도 할 것이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 책들은 (책이라고 불러야할지도 의문이지만) 번역하기도 어렵고 번역되지 않는 것이 낫다.

우선 <장 상퇴이유>와 <생트뵈브에 반대해서>는 둘 다 근본적으로 미완성 원고라는 어려움이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잃시찾'도 미완성이지만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이 두 책은 완전히 초고 상태이고 전체 구성도 제대로 없고 문장도 이가 안 맞는 부분이 수두룩하다. 더구나 <생트뵈브에 반대해서>의 경우에는 기존의 두 판본 모두 문제가 많아 새로운 판본이 나와야한다는 얘기가 많은데 문제는 새로운 판본이 나온다 해도 논란은 사라지지 않을거란 것이다. 




결국 누군가가 이 책들을 한국어로 번역 출판하려고 하면 당장 어려움이 많다.
(1) 둘 다 미완성 원고이다.
(2) <장 상퇴이유>의 경우는 젊을 때의 작품이라 잃시찾에 비해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
(3) <생트뵈브에 반대하여>는 소설 형식이 아니라 약간의 소설적 파트와 노골적인 비평문이 뒤섞인 형식이어서 독자가 편하게 읽을만한 책이 못 된다.
(4) <생트뵈브에 반대하여>는  판본 정립 자체가 문제가 많다. 더구나 '생트뵈브'를 집필하다 점차적으로 책의 구도를 바꿔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된만큼 수많은 원고 중에서 어디까지가 순전히 생트뵈브이고 어디부터가 잃시찾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최근 학계의 의견은 생트뵈브가 독립적 텍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이 책 중 하나를 번역해서 출판했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가뜩이나 중요성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프루스트이고 더구나 '잃시찾' 일곱 권을 번역판으로라도 완독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천명이나 될지 의심스러운 판에 작가의 다른 작품 두 개가 출판된다고 하자. 그러면 오히려 세일즈 면에서는 나을지도 모른다. 왜? 분량만 엄청 길고 읽기 빡빡한 잃시찾 대신 좀 더 만만해 보이는 이 두 권에 덤벼드는 독자가 많을테니까.

그런데 막상 책은 내용이 후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책들을 읽고 프루스트에 흥미가 생겨 '잃시찾'을 제대로 읽는 독자가 늘어나기는 커녕..... 역효과만 날 것이다.

결국, 아쉽지만 저 책들은 그냥 번역이 안 된 상태로 남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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